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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이란 지명의 유래
    자유게시판 2023. 8. 20. 14:18

    <조선성시도朝鮮城市圖>는 원래는 10매로 된 지도집地圖集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지도에는 도성 안의 궁궐, 도로망, 하계망, 다리를 비롯하여 문묘, 사직, 경모궁, 영희전 등의 주요 건축물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통해서 도성 밖으로 연결되는 도로도 표시되어 있으며, 도성을 휘감아 흐르는 한강과 한강 너머의 관악산을 표현하고 있다. 도로망은 붉은색이며 하계망과 산은 청록색으로 채색하였다. 경복궁은 궁궐터만 남은 형태로 그려져 있으며, 경희궁慶熙宮이 1760년(영조36) 이후 이름인 '경희궁慶禧宮'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도의 우측 여백에는 태조대 도성 축조에 동원된 전국 민정民丁의 수가 총 20만이라는 기록과 도성의 둘레가 9,975보, 높이가 48척2촌, 주거하는 백성은 30,723호임을 기록하고 있다. 지도의 이면裏面에는 서울의 행정구역인 5부 49방의 명칭을 부部별로 열거하였다.

     

    우리나라 도시의 이름을 살펴보면 대개가 한자(漢字)를 사용합니다. 서울이라는 지명은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도시를 정비해 나가는 과정에서 유래하였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제일 먼저 궁과 성을 건축했는데, 정도전과 무학은 종교적 사고와 유교적 바탕을 앞세워 서로 강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두 사람의 이러한 태도는 성역(城役)을 정하는 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현재 청와대 옆산 인왕산 북쪽에 선바위가 있는데, 이 선바위를 성 안쪽으로 하자는 무학의 주장과 성 밖으로 하자는 정도전의 주장은 이 태조가 민망스러워 하리만큼 팽팽했습니다. 그 바람에 다른 도성은 다 쌓았는데, 인왕산 선바위 부근만 미완성으로 남았습니다. 두 사람의 의견 대립으로 공사가 진척되지 않던 어느 날 아침 밤새 첫눈이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 한양 땅이 모두 하얀 빛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 눈 구경을 하던 태조는 낙산 쪽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이상하게도 성 안쪽으로는 눈이 보이지 않고바깥쪽에만 눈이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태조는 별감들을 보내서 보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다녀온 별감들이 아뢰기를 성곽 밖으로만 눈이 쌓였고 안쪽은 맨땅이 드러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도 기이한 일이라 태조는 하늘이 한양의 경계를 알려 주려고 그러는가 보다 여기며 별감들에게 다시 궁궐 옆산 인왕산 선바위 주변을 살펴보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다녀온 별감들은 선바위를 중심으로  안쪽은 눈이 없고 바위를 포함한 바깥쪽은눈이 쌓였다는 것이었습니다.

     

    태조는 정도전과 무학을 입궐케 하여 이 사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이로써 선바위 안쪽으로 성곽을 쌓게 되었는데, 이날 내린 눈이 성곽 안쪽과 바깥쪽의 경계를 뚜렷하게 제시해 주었다 하여

    '눈 설(눈), 울타리 울(鬱)'

    '눈과 울타리'란 뜻으로

    '설울(雪鬱)'이라고 해서

    1945년 해방 이후 '설울'은 '서울'이란 세련된 지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 이형표 철학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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