牛浦 차병찬
2014. 4. 26. 10:20
![정철_[관동별곡]](http://static.naver.net/ncc/2011/05/13/153218436396725.jpg)

정철(鄭澈, 1536∼1593), 우리에게 [관동별곡] 등과 같은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단, 그의 진면목은 문학사에서뿐 아니라 당대 정치사에서도 찾아진다. 정철은 정치적으로는 선명성을 강조하였던 당대 서인의 영수였다. 이제 그의 정치적 행적을 따라가 보자. | |
천상의 인물인 듯한 가사문학의 대가

어느 날 이항복에게 누군가가 정철이 어떤 사람인가를 물어보는 이가 있었다. 이항복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성과 한음 가운데 오성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이 질문에 대해 이항복은 “송강(정철의 호)이 반쯤 취해서 즐겁게 손뼉을 마주치며 이야기 나눌 때 바라보면 마치 하늘나라 사람인 듯 하지”라고 대답했다. 마치 풍류를 잘 알아 천상세계에나 만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전하고 있다. 그의 풍류에 대한 기억은 후학들에게 전해져 정철의 문인으로 알려진 권필은 정철의 묘소를 지나며 읊은 시에서,
빈 산에 낙엽지고 비 쓸쓸히 내리는데 송강 재상 풍류는 이곳에서 적막하네 섭섭타, 술 한잔 올리지도 못하나니 그 옛날 장진주사 오늘을 말한 듯
이라며 스승의 풍류를 느낄 수 없음을 슬퍼하고 있다. 장진주사란 정철이 지은 사설시조 형식의 권주가를 말한다.
정철은 우리에게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려진 바,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 등 4편의 가사 이외에도 1백여 수 이상의 시조 등 주옥과 같은 작품이 전한다. 그 가운데 관동별곡은 그가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 지은 가사인데, 이 가사를 지은 이유는 목적성이 있었다. 즉 정철이 강원도관찰사로 재직하면서 백성들의 풍속이 우매한 것을 보고 교화를 위해 관동별곡을 지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상당수의 작품들 속에는 이런 목적성이 내포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려진 정철, 그는 실상은 치열한 정치 현장에서 온 몸으로 상대 당파에 맞섰던 정치인으로써 성격이 더 강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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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서루와 오십천’ 정철의 [관동별곡]에 소개된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죽서루에서 내려다보는 오십천 경관과 강 건너에서 바라보는 죽서루와 절벽부의 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ncc.phinf.naver.net/ncc02/2010/7/21/64/01.jpg)
‘죽서루와 오십천’ 정철의 [관동별곡]에 소개된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죽서루에서 내려다보는 오십천 경관과 강 건너에서 바라보는 죽서루와 절벽부의 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원칙과 소신에 따른 관료 생활

정철은 어린 시절 유복한 가정에서 생활하였다. 그의 누이 중에는 인종의 후궁과 종친 계림군 이유의 부인이 있어 왕실의 인척으로 위세가 대단하였다. 그런데 명종 즉위 후에 발생한 을사사화에 계림군을 비롯해 부친과 형이 연루되면서 급격하게 가세가 위축되었고, 전라도 창평으로 낙향해서는 약 10여 년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정철의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기로, 이때 스승인 기대승이나 김인후, 그리고 유희춘 등을 만나 학문을 배웠고, 이이나 성혼 등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명종 17년(1562) 과거에 급제하며 관료생활을 시작한 정철은 원칙과 소신을 가진 관료였다. 그가 사헌부 정언 재직시인 명종 21년(1566) 국왕 명종의 종형인 경양군과 관련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경양군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서얼 처남을 꾀어 죽인 뒤 강물에 던져버린 사건이 있었다. 당시 국왕 명종은 자신의 종형이 간여된 일이므로 이를 조용하게 넘기려고 정철을 설득시켜 논박을 정지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정철이 국왕의 요청을 거부하였던 것이었다. 이로 인해 정철은 파면되었고, 그후 전라도 광주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3년간은 주요 관직에 낙점이 되지 않다가, 선조가 즉위하면서 이조좌랑에 제수되었다. | |
격탁양청(激濁揚淸), 정치의 선명성을 강조한 서인의 영수

정철은 선조 즉위 이후 이조좌랑을 시작으로 다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 정철은 앞서 사화기를 거치면서 누적된 훈척정치의 청산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동시에 새로운 사림의 시대에 걸맞는 정치 확립에 주력하였다. 그가 이때 내세운 것은 격탁양청, 즉 탁한 것을 몰아내고 맑은 것을 끌어들인다는 것이었다. 사림정치의 선명성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었다.
정철이 이조좌랑직에 있으면서 사림들의 진출을 도모하자 이에 대해 김개 등이 견제하면서, “오늘날 사류의 폐습은 거의 기묘 연간과 같다.”고 한 적이 있었다. 기묘 연간이란 기묘사화 당시 화를 당한 조광조 등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정철은 김개의 발언이 못되고 악한 말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자 국왕은 언성을 높이면서 정철을 힐책하였는데, 정철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말하기를 “아무리 뇌정(雷霆)과 같은 진노가 계시더라도 신의 말씀은 다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는 김개 등을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과 심정 등에 비교하며 비난하였다. 이 일로 결국 정철은 삭탈관직되었다. | |

전라남도 담양군에 위치한 식영정. 정철이 고향에 내려와 있을 때 머물던 정자로, 성산별곡의 창작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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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의 타협도 없는 그의 정치적 자세는 선조 8년경을 전후로 해서 붕당이 형성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오죽했으면 “당시 조정에 동인과 서인의 당파가 있었는데 정철은 동인이 가장 기피하고 싫어하는 인물”이었다고 평하였을까. 동·서인 분당 초기에 정철은 낙향해 있다가 이조판서에 제수되어 서울로 올라와서는 동인 박근원과 홍여순, 허봉 등 3인을 귀향보낼 것을 청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이에 김우옹 등이 불가함을 간쟁하고 정철을 탄핵하면서 서로 왈가왈부하였다. 그러자 선조는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정철은 그 마음이 곧고 행실은 바르나 다만 그 말이 곧아 당대에 용납되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샀노라. 그러나 그가 힘을 다해 직무에 충실했던 점과 맑고 충직한 절의 때문에 초목조차 그 이름을 다 기억한다. 정말 이른바 백관 중의 독수리요, 대궐의 맹호라 할 만하다. 이런 사람을 죄주면 주운(朱雲-중국 한나라 때 충신)같은 충신을 목 베어야 한다는 말과 같으리라” | |
독수리는 중국 후한 때 재상 공융이 예형을 천거하면서 솔개 백 마리가 있다 해도 한 마리 독수리를 당하지 못한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고, 대궐의 맹호란 송나라 유안세가 간의대부로 있으면서 오직 공도만을 지키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데 서 유래한 것이다. 이 같은 정치 자세에 대해 율곡 이이는 화평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 |
정치 중심에서, 정여립 옥사와 세자 책봉 논의

동인과 서인의 분당 이후 정철이 속하였던 서인은 조정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였다. 반전의 기회가 되었던 사건이 정여립 옥사였다. 선조 22년(1589) 10월 당시 황해 감사 한준의 비밀장계로 촉발된 정여립 옥사에 대해서는 그 진위 여부가 당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당시 정철은 심문을 주관하는 위관(委官)으로 활동하였다. 옥사가 시작된 후 정여립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고, 이발, 이길 형제와 정언신․백유양․최영경․정개청 등 동인측 명사가 대거 처벌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서인 주도의 정국으로 전환되었는데, 그 중심에 정철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연려실기술]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큰 변고가 일어나니, 서인들이 기뻐 날뛰고 동인들은 기운을 잃었다. 이것은 앞서 임금이 서인을 싫어하여 이산해(李山海)를 이조 판서 자리에서 10년 동안이나 두는 사이에 서인들은 모두 한산(閑散)한 자리에 있게 되어 기색이 쓸쓸하더니, 여립의 역변이 일어나 후에는 갓을 털고 나서서 서로 축하하였으며 동인들은 스스로 물러나고, 서인은 그 자리에서 올라서 거리낌 없이 사사로운 원한을 보복하였다.
정여립 옥사로 주도권을 잡은 정철과 서인측에서는 승부수를 띄웠다. 다름 아닌 세자 책봉과 관련된 건저의(建儲議)였다. 국왕 선조가 생존한 상태에서 세자 책봉은 대단히 민감한 문제로, 신하들의 입장에서 사실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일로 정철은 거의 정치 일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건저의는 [송강연보]에 따르면, 정승이 된 유성룡이 정철에게 말하였고, 삼정승인 이산해와 유성룡, 정철이 함께 국왕 앞에서 건의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이들이 세자 책봉 대상자로 거론한 인물은 광해군이었다. | |
그런데 이산해가 약속한 날짜에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국왕 선조가 의중에 두고 있던 인빈 김씨의 소생인 신성군의 외삼촌 김공량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정철 등이 신성군 모자를 제거하려고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인빈 김씨에게 전해지고 이어서 선조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선조는 바로 이 사실을 내외에 공표하지 않고 있다가 뒷날 경연에서 정철이 세자 책봉을 건의하자 크게 노하여 그 자리에서 정철을 좌의정에서 체직시켰다. 임진왜란 때 잠시 재등용되기는 하였으나 어찌 보면 정철의 정치 일생은 건저의 문제로 마감했다고도 보인다. | |
군자(君子)? 독철(毒澈)? 상반된 평가의 주인공

풍류를 아는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그리고 서인의 영수로서 정치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정철은 당대뿐 아니라 이후에도 매우 극명하게 상반되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당대 서인측 조헌은 정철에 대해서, “오로지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며 강개한 곧은 말만 하기 때문에 백관들이 두려워한다”고 하여 그의 강직함과 평소의 정치적 자세를 높이 평가하였다. 사후 서인 김장생은 그를 군자라 평가하면서 그를 비난한 자를 소인이라 지목하기도 하였고, 신흠은 다음과 같이 그를 평하였다.
정철은 평소 지닌 품격이 소탈하고 대범하며 타고난 성품이 맑고 밝으며, 집에 있을 때에는 효제(孝悌)하고 조정에 벼슬할 때에는 결백하였으니, 마땅히 옛사람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와는 달리, 동인의 한 분파인 북인측에서 주도하여 편찬한 [선조실록]에서는 정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自招)하였다. 최영경(崔永慶)이 옥에 갇혀 있을 적에, 그가 영경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나라 사람이 다같이 아는 바이고 그가 이미 국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도 모두 정철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마침내 죽게 만들었으니 남의 손을 빌려 했다는 말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한때 그의 강직함을 칭찬하기도 하였던 국왕 선조는 최영경의 죽음과 관련해서, “‘음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兇渾毒澈殺我良臣).”고 하였다고 전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