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연산군 묘/방학동 은행나무.원당샘공원/정의공주묘 외 (2014.6.22)

牛浦 차병찬 2014. 6. 23. 16:11

 

 

연 산 군  묘 (燕 山 君  墓)

 

 

*** 위 상설도 참조 ***

 

연산군.군부인 신씨 (君夫人 愼氏) 묘역

 

 

사진 아래, 의정궁주(義貞宮主, 趙氏,태종의 후궁) 묘

 

연산군 사위 구문경(具文景).딸 묘

 

묘역 뒷편 곡장 밖에서 본 전경

 

묘역 앞에서 본 전경

 

 

 

 


 

 

 방학동 은행나무.원당샘공원

 

지정종목 시도기념물

지정번호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3호

지정일 2013년 3월 28일

소재지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546

종류/분류 식물

 

 

2013년 3월 28일에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다.

 

 

보호구역 총면적은 548㎡이며, 나무의 높이 25m, 둘레 10.7m, 직경 2.5m이다. 국립산림과학원의 과학적 수령조사 결과 550±50년으로 측정

되었다. 기념물로 지정된 서울시 소재 수목 중에서도 천연기념물 제59호 서울 문묘 은행나무(수령 : 702년) 다음으로 수령이 오래된 것이다.     조선 전기에 식재된 나무로 수령이 오래되어 이 지역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수형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고, 생장상태도 양호하다.

기념물로 지정되기 전에는 서울시 보호수 1호(10-1, 1968.2.26)로 보호하였다.

 

 

인근에 사적 제362호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과 부인 신씨(愼氏)의 묘소가 있다.

서울시에서는 이곳을 북한산둘레길 도봉구간의 출발점으로 지정했다.

 

 

 

 

 

 

 

연산군 묘역, 은행나무,원당샘공원은 서로 이웃해 같이 있다.

 

 

 

 

 

 

600년 동안 물이 마르지 않았다는 원당샘과 원당샘공원

 

은행나무 옆 자귀나무

 

 

 


 

 

 

정의공주.양효군 안맹담의 묘 / 사천목(睦)씨 선영.재실

 

 

          ~ 정의공주(貞懿公主) ~  1415년~1477년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의 차녀이다.

1428년[세종10] 정의공주로 책봉되어 관찰사 안맹지의 아들 연창위 죽성군 안맹담에게 하가하였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등 자녀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을 다 끝내지 못하여서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풀지 못하였다.

이에 정의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이에 세종이 크게 칭찬하며 노비 수백을 하사 하였다.      -죽산안씨 대동보-

 

정의공주는 남편 안맹담이 죽자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장보살 본원경 상, 중, 하[보물966호]를 간행하였다.

공주는 성종8년[1477]2월에 사망하였고 슬하에 4남2녀를 두었다.

 

 

           ~ 안맹담(安孟聃) ~ 1415년~1462년

 

본관 죽산 자는 덕수로서 가선대부 함길도 관찰출척사 함흥부윤 안망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10년[1428] 부마가되어 죽성군이 되었고 세종14년[1432] 연창위에, 세조3년[1457]에는 원종공신이 되었다.

세종은 그에게 한강 가운데에 있는 저자도와 낙천정을 하사하였다.

그는 불교에 심취했으며 초서를 잘 써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고 음악과 의학에도 통달했다.

특히 술을 좋아하여 병이 날 정도였고 이를 안 세종이 술꾼들의 출입을 금할 것을 명했다.

세조8년[1462] 47세의 나이로 별세 하였다. 부음을 들은 세조는 조회를 이틀 동안 폐지하였고 "어릴 적 부터 함께

고유하여 애통함이 마음에 간절히 사무친다" 라는 제문을 내릴 정도로 애도하였다.

시호는 양효[마음이 따뜻하고 즐기기를 좋아하여 양(良)이라 하고, 어버이를 사랑으로 섬겼다 하여 효(孝)라 하였다.

1466년[세조12] 묘소 동남쪽 아래에 신도비를 세웠다.

 

 

 

 

정의공주.양효공 안맹담의 묘, 아래는 후손 안종해의 묘 (일반적으로 남좌, 여우이나 정의공주 묘가 좌측 임)

 

                    <신 도 비>

             정인지가 비문을 짓고 공주의 4남 안빈세가 비문과 전액의 글씨를 썼다.

 

            

 

  하단의 묘는 안맹담의 후손 안종해의 묘이다.

 

 


 

 

 

 

 표지석.재실 뒷편에 사천목씨(泗川睦氏) 선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