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어머니의 눈물젖은 베개 (이모님-조남진 장군 어머니- 이야기)

牛浦 차병찬 2017. 5. 12. 22:16

 

 

어머니의 눈물젖은 베개

네이버 블로그 | 안시성(安市城) 645년 그날   (조남진 장군 블로그)

어릴 때 어머니의 베개는 매일 눈물로 흠뻑 젖었다.

종갓댁 맏며느리인 어머니 나이 27세인 기축년(1949년)에 아버지가 갑작스런 병으로 돌아가시고, 몇 달 후 아홉살 난 맏아들인 큰형이 까닭모를 병으로 타계하였다.

슬픔을 못이겨 매일 술을 마시던 할아버지 마저 그해 섣달에 별세하셨다. 종가의 3대 장손이 한 해에 모두 돌아가신 비극을 맞은 것이다.

 

여덟 식구였던 우리 집에는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와 우리 형제 5식구만 남았다. 일 년 후에는 증조할머니 마저 세상을 떠났다. 우리 집에는 빈소가 한꺼번에 3개가 생겼고 일이년 사이에 식구가 반으로 줄어들었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세 개의 빈소에 밥상을 올렸고 초하루, 보름날에 되면 상복을 갈아입고 빈소를 다니며 호곡을 하셨다. 이렇게 어머니는 어른들의 3년 상을 모두 치루셨다.

우리집 제일 어른은 할머니였고 우리 할머니는 무섭기로 소문난 영월 엄씨였다. 동네 아낙네들이 함부로 말 걸기도 어려운 분이었다. 종가라서 친인척 손님들 그칠 날 없었다.

사대봉제사하느라고 조상님 제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제사는 설, 추석을 제외하고도 일 년에 아홉 번 지냈다. 그때 제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오늘날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제사상 준비하려면 며칠 전부터 집에서 쌀 방아를 찧었다. 놋으로 만든 그 많은 제기를 모래와 짚으로 모두 닦아야했고, 며칠전부터 술을 담그고 콩나물을 길렀다.

제사가 되면 8촌이내 어른들이 다 모였고, 제사는 새벽닭이 울기 직전까지 기다렸가가 지냈다.

제사를 지낸 후면 한밤중에 동네 집안 어른들께 드리기 위해 집안 아주머니들이 제삿밥을 머리에 이고 날났다.

그 당시 별 할 일이 없던 동네 어른들은 남의 집 제삿날을 쫙 외우고 있었고, 누구 집 제삿날이면 잠을 자지 않고 새벽까지 기다렸다. 또 많은 집안 어른들이 파제날라고 하는 다음날 아침에 오셔서 식사를 했다.

수도가 없었기 때문에 매일 사용하는 그 많은 물을 어머니는 새벽부터 우물에서 길러 동이에 이고 날랐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은 농경사회가 되어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였다. 1950년대 까지는 옷도 집에서 만들어 입었다.목화를 길러 목화꽂으로 솜을 털고, 솜에서 물래를 돌려 실을 뽑고, 그실로 베틀에서 베를 짰다.그렇게 만든 베를 잘라 바늘로 옷을 기워 만든다. 실 한 가닥 씩 베를 짜고 바느질로 일일이 옷을 만드는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옷을 시장에서 사입기 시작한 해는 대략 1950년대 후반부터인 것 같다.

우리 집은 대농이라 농사가 많았다. 머슴이 두 명이었고 아침식사부터 저녁까지 이들이 먹는 밥과 막걸리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 집은 동네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식사 때가 되면 꼭 거지들이 찾아왔고 어머니는 대문입구에 가마니를 깔고 밥을 한상 차려주었다.

막내 삼촌이 서울에 자리잡을 때 남겨둔 동갑내기 사촌동생이 2년 동안 우리 집에 같이 있을 때는 도시락을 세 개씩이나 싸야 했다.

젊은 날 어머니는 방에서 식사하신 적이 거의 없었다. 부엌에서 바가지에 밥을 비벼 한술 뜨는 것이 전부였다.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점심, 세찬등을 하루에 세번 이상 이고 날랐다.

고달픈 하루일과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때면 어머니는 내가 볼까봐 옆으로 돌아 누워 말없이 흐느꼈다.

 

어머니의 함자는 순()자와 영()이며, 창녕성씨 가문에서 음력으로 19231215에 창녕의 우포늪 부근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만세력을 보니 양력으로는 1924120일이다, 양력으로는 고생한 나이로 유명한 묻지마라 갑자생이다.

외할아버지는 선비라서 글공부만을 주로 하셨고, 외할머니 친정은 꽤 소문난 양반가문이라 돌아가실 때 까지 외할머니 기세가 등등했다. 따님 네 분과 아들 한 분을 두었고 어머니는 둘째 따님이었다.

어머니는 16세에 창녕 조씨 가문으로 시집을 왔고, 일본에 계셨던 27세 노총각인 아버지를 만났다.

1939년 아버지를 따라 일본 지바란 곳으로 가서 6년을 사시면서 두 아들을 낳았다. 그 때 그곳에서 식당을 하셨다고 하며 주로 조선사람들이 많이 왔다고 한다.

관동대지진이 나기 전 홀로 일본에 가신 할아버지와 늦게 합류한 삼촌들이 멀지 않은 곳에 사셨기 때문에 별로 외롭지는 않았던 것 같다.

1945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일 때 정세에 불안을 느낀 아버지는 해방직전인 1945년 7월 식솔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어머니가 귀국할때 보신 동경일대는 미군의 폭격을 받아 새까맣게 변했다고 한다. 

 

우리 집은 전형적인 대가족이었다. 위로는 증조모님부터 갓 결혼한 두 분의 삼촌네 가족을 포함하면 열 명이 훌쩍 넘었다. 이러한 집안에서 맏며느리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건국 일년 전인 1947년 삼복에 태어났다. 그날 얼마나 더운지 산모인 어머니는 행랑채 처마 밑에 돗자리를 깔고 해산을 하셨고, 비가 많이 내려 산모의 다리가 흠뻑 빗물에 젖었다고 한다. 

이러한 와중에서 1949년에 크나큰 비극이 닥친 것이다.

그 해 맨 처음 큰 사고는 세살박이 인 내가 웅덩이에 빠져 죽을 뻔 한 사건이었다, 어머니와 숙모님들이 방아를 찧고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놀던 내가 아무도 보지 않는 가운데 시멘트 웅덩이에 빠져버린 것이다. 나는 그날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 후 연이어 아버지, 큰형, 할아버지 순으로 세상을 떠났다. 3대 장손이 한해에 세상을 떠나니 모두들 집안이 완전히 망했다고 숙덕거렸다.

 

이듬해인 1950년에는 6.25전쟁까지 터졌다. 여덟 살 먹은 형을 데리고, 네살박이 나를 업고 떠돌던 피난길 고생을 어찌 필설로 다 표현을 할 수 있겠는가?

 

1958년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되던 해 12살인 나는 서울로 유학을 했다. 모든 사랑을 막내아들인 내게 쏟아 부은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졌으나 겉으로는 웃으시면서 나를 보냈다. 철모르는 나는 서울에 가서 공부한다는 희망에 부풀어 어머니와 이별하는 슬픔을 느낄 사이도 없었다.

 

그 후 방학 때마다 시골에 와서 어머니와 같이 보냈고, 방학이 끝나고 서울로 갈 때는 버스정거장으로 걸어가는 내 모습을 보려고 가물거릴때 까지 동구 밖에 서 계셨다. 나는 고향을 떠나온후 며칠씩 혼자 울었다.

 

19604.19학생의거가 일어나던 해, 고향에 계시던 숙부님이 할머니와 어머니를 설득시켜 내가 공부하려면 서울에서 어머니가 돈을 벌어야 된다고 하면서 얼마의 토지를 매각하여  마포 어느 시장에 점포를 내었다. 그러나 6개월 정도 지난 후 갑작스럽게 할머니가 별세하여 급히 고향으로 귀가하고 말았다.

그 때 어머니가 고향에  돌아가보니 할머니는 상중이었고, 할머니와 함께 지내던 형이 가출하고 없었다. 그 많던 식구들이 모두 흩어지고 어머니 홀로 그 집에 남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어머니는 세상을 비관하기 시작했다. 매일 밤, 마을 옆 큰 개울에 가서 몇 번인가 투신하려다가 내가 생각나서 돌아오시곤 했다고 한다.

 

 

그 이후 어머니는 큰 결심을 하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쭉 우리 집 재산관리를 하던 작은아버지로부터 재산관리권을 되찾는 것이다.

고향에 계신 작은아버지는 마을과 인근에서 드세기로 소문난 분이었다. 우리집 살림을 관리하다보니 여유도 생겨 지방 유지들과 교우하면서, 정치라는 것도 좀 하셨다. 평시조도 잘 읊고 두주도 불사하는 호걸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주먹도 세었다고 하며, 해방 전 일본에서 귀국할 때, 밀양에서 건달들을 만나 여덞 명을 혼자서 해치웠다는 자랑을 자주 하셨다. 어머니보다는 다섯 살이 많았고,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여자와 아이들만 남은 우리 집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다. 내가 서울로 유학 한 것도 전적으로 작은아버지의 뜻이었다.

 

그러나 당시 어머니의 생각으로는 더 이상 재산관리를 그분에게 맡겼다가는 두 아들을 키울 자신이 없었다고 생각하고, 작은아버지를 우리살림에서 손떼게 했다.

작은아버지는 매우 분노를 했고, 이로 인해 몇 년 동안 불화가 이어졌다. 험악한 분위기가 상당기간 집안을 지배했으나 결국 작은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마음은 점점 강철처럼 강해졌고 더 이상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머슴이 있었지만 직접 들에 나가 농사일을 했다. 낙동강 변에 있는 드넓은 밭의 일은 끝이 없었다. 어머니는 시원한 바람에 나붓기는 농작물을 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러나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낙동강 홍수로 하루아침에 다 쓸려나가면 허망한 모래벌판만 남기도 했다.

 

1965년에는 대홍수로 우리 집까지 완전히 물에 잠겼고 누대로 살아온 안채 건물이 쓰러지고 말았다. 형님도 군대에 가고 난 다음이라 어머니는 혼자서 터를 고르고 정부의 도움을 받아 집을 새로 지었다.

 

나는 어머니의 정성과 기도 덕분으로 어렵기로 소문난 00학교로 진학을 했다. 00학교로 간 동기는 어머니를 더 이상 고생시켜드리지 않겠다는 의지도 많이 작용했다.

생활이 너무 바빠 한번도 내가 다니는 학교에 와 보지도 못했던 어머니는 내가 00학교를 졸업 하는 날, 평생 처음으로 나의 졸업식에 참석하셨다.

형님이 결혼을 하고 난 후에도 어머니는 농삿일에 손을 떼지 않았고, 내가 결혼한 후까지 농사 걱정으로 우리집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이미 인생을 달관한 어머니는 내가 월남전에 간다고 이별을 할때도 겉으로 걱정스런 표현을 조금도 하지 않았으나, 내가 결혼할 때는 평생소원을 다 이룬 것처럼 행복해 하셨다.

우리 아이들이 태어날 때 마다 그토록 기뻐하셨던 어머니는 손자들 학교에 가는 것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내가 경기도 어느 마을에 살 때 어머니가 오시면 손자가 유치원에 갈때 업고 데려다 주었고, 돌아올 시간에는 대문 앞에 나가 기다렸다.

그러나 내가 서른 여섯살이 되는 해부터 어머니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간경화였다. 오랜 세월 고생에 시달리다가 병을 얻었고,너무 늦게 발견한 탓에 제대로 치료받을 시간도 없었다.

마산에 있는 병원에 입원을 했지만 손을 쓸 수도 없었고, 1983년이 시작되던 1월에 어머니는 온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환갑이 되려면 일 년이나 남았고, 맏손자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몇 달 전이었다.

지금 어머니는 고향 선산에 아버지 바로 옆에서 잠들어 계신다.

 

 

 

 

● 이 글은 외롭고 청초하게 살다가신 나의 어머니를 추모하는 글이지만 험난했던 우리 가족사이기도 하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이고 쓰려고 하다가 어머니란 말이 나오면 가슴이 복받쳐 올라 시작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가신지 한 세대가 흐른 지금에 이르러나의 자식들에게 할머니가 얼마나 훌륭한 분이었는가를 전하기 위해 눈물을 훔치며 이 글을 쓴다.

오늘날 나와 우리 자식들이 누리는 행복은 오로지 평생 즐거움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모진 가시밭길의 걷다가 짧은 일생을 마친 어머니의 거룩한 희생 덕분인 것을 가슴에 깊이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