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모교(초등) 개교 100주년에 즈음한 斷想

牛浦 차병찬 2021. 5. 21. 20:00

        

이방(梨房)초등학교의 전신(前身)은 초곡리 야학(夜學) 봉강재(鳳岡齋)이다

                                                                                                                 제37회 차병찬

   우리 4,800여 동문(同門)들의 자랑이며, 국민동요(國民童謠) ‘산토끼’(故 이일래(李一來) 선생 작사·작곡))의 발상지(發祥地)인 이방초등학교(梨房初等學校)의 개교(開校) 100주년(週年)을 맞이하여, 모든 일에는 항상(恒常) 그 일의 단초(端初)가 있듯이 모교(母校)의 전신(前身)을 한번 살펴보고 또, 재학시절(在學時節)의 단상(斷想)들을 여기에 적어본다.

  올해 제95회 졸업생(卒業生)을 배출(排出)한 바 있는 이방초등학교의 전신은 이방면(梨房面) 초곡리(草谷里)에 낙호정계(樂乎亭契, 현재도 존속)를 조직(組織)하고 지금은 화재로 소실(燒失)된 5칸 2줄의 초기 낙호정(樂乎亭, 현재(現在)는 동네 한복판 3칸 2줄)을 자비(自費)로 세우고 지역민(地域民)의 친목(親睦)을 위한 교류의 장은 물론, 과객(過客)들에게 숙식(宿食)을 융숭(隆崇)하게 대접(待接)하여 인근 주민들의 칭송(稱讚)을 받던 고(故) 차현기(車炫基, 哲廟 癸酉1873~己卯1939, 小雲處士)님께서 1914년 동민(洞民)들과 협의하여 현재의 초곡리 마을회관과 경로당(敬老堂) 부지(敷地)에 봉강재(鳳岡齋, 봉곡(鳳谷, 초곡의 다른 명칭) 산등성이에 지어진 재실의 뜻))를 건립(建立)하고 또한 사비(私費)를 들여 동유재산(洞有財産)으로 만들어 원근 최초의 야학(夜學)을 운영(運營)하여 무료로 한학(漢學)을 수학(修學)하게 하고 훈장급여(訓長給與) 등 제(諸) 경비를 충당하여 일제(日帝) 말(末)과 해방직후(解放直後)까지 그 명맥(命脈)을 이어온 야학(夜學)이 모교 이방초등학교의 효시(嚆矢)라 할 수 있다. 그분의 묘비에 행적이 기록되고, 마을 입구에 소운처사유적비(小雲處士遺蹟碑, 이방초교 교감(校監)을 역임(歷任)한 차용순(車龍淳) 찬(撰))를 세워 그 공덕(功德)을 기리고 있다. 이 내용(內容)은 창녕향교지(昌寧鄕校誌) 875쪽에 수록(收錄)되어 있다. 그리고 초곡리에는 1911년 그 분과 종인(宗人)들의 협력(協力)으로 세워진 연안차씨(延安車氏) 문중(門中)의 재실(齋室)인 봉양재(鳳陽齋) 경내의 존경각(尊敬閣)에 조선(朝鮮)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 난(亂)에 선봉대장(先捧大將)으로 큰 공(功)을 세워 호조판서(戶曺判書, 현 재경부장관)에 추증(追贈)되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충신(忠臣)으로 수록(收錄)된 중시조(中始祖) 강렬공(剛烈公) 차운혁(車云革) 선조(先祖)님의 유상(遺像)을 모시고 매년 삼월삼짇날, 예전에는 유림봉사(儒林奉祀)를, 현재에는 후손봉사(後孫奉祀)를 하고 있다. 연전(年前) 낙호정 서고(書庫)에 있던 수많은 고전(古典)과 참고자료(參考資料) 등 전적(典籍)들을 보관상(保管上)의 문제 등으로 창녕박물관(昌寧博物館)에 기증하고 기증증서(寄贈證書)를 받아 낙호정 관계자가 보관하고 있다.

  학창(學窓)시절을 돌이켜보면, 지금은 세계적(世界的)인 람사르협약(協約) 생태습지(生態濕地)의 명소(名所)가 되어 우리들의 자랑거리인 ‘우포늪’은 당시에는 여름철 비만 오면 낙동강(洛東江)의 범람(氾濫)으로 등하굣길이 침수(沈水)되어 흙탕물이 허리께까지 올라와 우만(牛晩)에서 학교(學校)까지 가는 길을 신작로(新作路)의 포플라 가로수(街路樹) 가운데를 기준(基準)으로 책 보따리를 머리에 얹고 동시(同時)에 삿갓을 잡고 가는, 지금 생각(生覺)하면 우스꽝스러운 몰골(沒骨)로 등하교(登下校)를 하곤 했다. 또, 6.25 전쟁(戰爭)에 파괴(破壞)된 교사(校舍)가 덜 복구(復舊)되고 또한 책걸상도 모자라 여름이면 학교 교정(校庭)의 큰 프나타나스 나무그늘 아래에서, 겨울이면 남의 양지바른 묘역(墓域)에서 각자가 집에서 짚으로 엮어온, 본인이 앉을 자리를 만들어 남학생은 책 보따리를 어께에, 여학생은 허리에 매고 또한 이 짚자리를 등하교시(登下校時) 항시(恒時) 가지고 다녀야 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학교생활(學校生活)을 하다 3학년 때에 교실(校室)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책걸상이 모자라 일부는 맨바닥에서 공부(工夫)해야 했으며, 교실(校室) 바닥에 양초를 칠하고 조약돌로 밀어서 반들반들하게 윤(潤)이 나도록 대청소(大淸掃)를 한 경험(經驗)이 있다. 그 이후에 보급(補給)된 겨울철 난로(暖爐)의 연료(燃料)인 이른바, ‘마세크’탄이라 부르던 갈탄(褐炭)의 수급(需給)이 태부족(太不足)하여 수업(受業)을 받아야 할 시간에도 학교 뒷산인 코장산(228.3m)에 단체로 솔방울 등 연료채취(燃料採取) 작업을 하여야 했다. 그 난로위에 얹어 태워가며 데워 먹던 노란 알루미늄 도시락에 주로 날된장이나 콩자반이 주 반찬(飯饌)이던 시절이 지금은 추억(追憶)의 편린(片鱗)으로 남아있다. 지금이야 추우면 난방(煖房), 더우면 에어콘을 가동하고 의복이 좋으니 몸으로 느낄 온한(溫寒)이 그리 크지 않지만 그 당시만 해도 추우면 추위를, 더우면 더위를 하루 종일(終日)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아침조회(朝會)시간에 교장(校長)선생님 훈화(訓話)를 듣고 난 후 매주(每週) 한 번씩 용의검사(容儀檢査)를 했는데, 그 항목(項目)은 손발을 잘 씻었는지(당시는 겨울이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손발이 거북등처럼 갈라짐) 손발톱은 잘 깍았는지 등을 검사(檢査)하였다.

  또한, 호롱불 아래서 숙제(宿題)를 하다 머리카락을 태워오는 아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으며, 지금은 멸종(滅種)되다시피 한 이(蝨), 빈대, 벼룩 등이 기승(氣勝)을 부려 지금은 부작용(不作用) 때문에 쓰지않는 DDT를 많이 사용(使用)하기도 하였다. 또, 먹거리가 귀(貴)하던 시절(時節)이라 미국(美國)의 잉여농산물(剩餘農産物) 원조계획(援助計劃) 480호에 의한 옥수수가루, 밀가루, 전지분유(全脂粉乳) 등을 배급(配給)받기도 했다. 그래도 봄·가을 현창, 등림, 한터 둑 등으로 소풍(消風)을 갈 때면 계란(鷄卵) 후라이 덮은 도시락에다 귀한 사이다나 가락엿 한 가락 겨우 살 수 있는 적은 금액이지만 용돈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우리는 5학년까지는 두 반(班)이었으나 가사 등 여러 이유로 자퇴(自退)하는 학생들이 상당히 있던 시절이라 6학년이 되자 72명이 한 반으로 편성(編成)되어 그야말로 콩나물시루 교실 이었다. 당시 도시학교(都市學校)에서는 오전반(午前班), 오후반(午後班)이 있었으며, 지금의 20명 내외(內外)로 반(班) 편성(編成)을 하는 것을 보면 이 또한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든다. 당시에는 500~600여명을 육박(肉薄)하던 학생 수(數)가 지금은 학교의 존폐(存閉)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인구의 도시집중(都市集中)으로 인구절벽(人口絶壁)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나라 근대사(近代史)의 격변기(激變期)라 5학년이던 1960년 4.19가, 1961년 5.16이 일어나서 여름방학 때 소집(召集)되어 혁명공약(革命公約)을 외워 그 외우는 순서대로 하교 시키던 때가 있었다. 세월(歲月)이 많이 지난 지금은 국기(國旗)에 대한 맹세(盟誓)내용도 바뀌고 행사시(行事時) 낭독(朗讀)하던 국민교육헌장(國民敎育憲章)도 없어졌고, 당시 외우던 혁명공약 제6조는 민간(民間)과 군인(軍人)의 내용(內容)이 달랐던 기억(記憶)도 난다.

  세월이 흘러 졸업 40주년이던 2002년에는 모교에서 동기회(同期會)를 열어 6학년 담임(擔任)이셨던 김용칠(현재 미국 거주, 목사) 동기생의 부친이신 김태기 선생님과 담임 맡으신 적은 없지만, 늘 우리 곁에 계셨던 차용순 선생님을 모시는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는데, 기억(記憶)이 많이 나는 또 한분 선생님으로 동산(東山)의 노재억 선생님은 우리 동기생 노승현의 부친으로 당시 귀하던 풍금(風琴) 연주(演奏)를 잘 하셔서 이 반, 저 반으로 이동(移動)하시면서 음악(音樂)을 가르치셨다. 우리 37동기회는 작년(作年)과 금년(今年)에는 코로나 19 사태(事態)로 열리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매년 봄 꽃피는 시절에 열리고 있다.

  또, 지금은 학교 뒷편에 잘 조성(造成)된 ‘산토끼동산’이 전국(全國)의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있으며, 따오기 복원으로 더욱 유명해진 우포늪과 부곡온천(釜谷溫泉) 등을 묶어 창녕군의 ‘창녕투어’ 코스로 되어있다는 반가운 소식(消息)을 더하여 어딜 가나 “저는 우포늪 부근의 국민동요 ‘산토끼‘ 발상지인 이방초등학교 출신(出身)입니다”라고 할 수 있을 자긍심(自矜心)이 되고있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모교이다.

  다시 한 번 창녕이방초등학교의 개교 100주년을 축하(祝賀)하며, 학교의 존속(存續)을 위한 동문들의 노력(勞力)을 바람과 동시에 모교와 선후배(先後背) 동문님들의 무궁(無窮)한 발전(發展)과 건안(健安)을 기원(祈願)하는 바이다.

 

 

 

창녕군 이방면 초곡리 낙호정(樂乎亭) 중건기(重建記) 현판(懸板)

 

야학(夜學) 봉강재(鳳岡齋) 설립자 소운처사(小雲處士) 차현기(車炫基) 유적비(遺蹟碑) 초곡리 마을입구 소재

 

비문(碑文) 사진, 좌측 중간부분에 봉강재(鳳岡齋) 및 낙호정(樂乎亭) 설립 내용  사진, 우측 말미에 종손(從孫) 용순(龍淳, 이방초교 교감 재직) 근찬(謹撰)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