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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소(獨笑) -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자유게시판 2022. 1. 10. 19:57

     

    홀로 웃다(獨笑) - 다산 정약용 


    有粟無人食(유속무인식) : 살림이 넉넉하여 양식 많은 집엔 자식이 귀하고

    多男必患飢(다남필환기) : 자식이 많은 집엔 가난하여 굶주림이 있다.

    達官必憃愚(달관필창우) : 높은 벼슬아치는 꼭 멍청하고

    才者無所施(재자무소시) : 재주 있는 인재는 재주 펼 길 없다.

    家室少完福(가실소완복) : 집안에 완전한 복(福)을 갖춘 집 드물고

    至道常陵遲(지도상능지) : 지극한 도(道)는 항상 쇠퇴하기 마련이다

    翁嗇子每蕩(옹색자매탕) : 부모가 절약하여 재산을 모으면 자식들은 방탕하고

    婦慧郎必癡(부혜낭필치) :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바보짓을 한다.

    月滿頻値雲(월만빈치운) : 보름달 뜨는 날은 구름이 자주 끼고

    花開風誤之(화개풍오지) :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댄다.

    物物盡如此(물물진여차) : 세상일이란 모두 이런 거야

    獨笑無人知(독소무인지) : 나 홀로 웃는 까닭을 누가 알아줄까?



    - 다산 정약용(丁若鏞)선생의  “홀로 웃다(獨笑)” 
    위의 한시(漢詩) 내용은 달리 설명이 필요 없다.
    시(詩)내용 그대로다.


    12줄의 내용이 보편적인 우리의 삶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산(茶山)선생은 세계사에 어떤 석학과 견주어도 상석(上席)에 모실 분이다.
    한국사의 자랑이요, 자존심이다.

    하지만 자신의 시 '홀로 웃다(獨笑)'처럼 허탈하게 웃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사다.
    18세기 초반부터 조선의 운명을 바꿔놓을 개혁의 인물로 정조(正祖)와 다산 정약용 선생이 등장한다.

    그러나 하늘은 조선이 행복해 지는 것을 원치 않았는지 개혁의 중요한 시기에 정조(正祖)를 하늘로 불러올렸다.

    따라서 이제 막 날개를 달아 일생의 포부를 조선의 개혁에 펼치려던 다산 선생의 날개도 꺾여 전남 강진으로 장장 18년의 유배길을 떠난다. 
    개인적인 역사관이지만 오늘날 허리가 잘린 반신불수 의 한반도 불행은 개혁의 기치를 내건 인조의 세자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년~1645년)의 죽음과, 정조의 이른 승하(昇遐)에 이어 고종의 무능과 갑신정변(申申政變)의 실패로 개혁 개방의 기회를 놓쳐버려 열강의 먹잇감이 된데에 기인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반도의 남북분단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국론분열(國論分裂)'이다.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은 명치왕(明治王) 때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막번체제(幕藩體制)를 무너뜨리고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이룩한 국가변혁이다.
    결국 막번체제가 양보를 하고 명치유신이 성공하여 오늘날 일본은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서게 된 것이다.

    일본의 명치유신이 1868년부터 1880년대에 마무리 되었으니까, 정조(祖)(1752~1800)와  다산(1762~1836)의 생(生)이 끝날 때가 일본의 명치유신과 비슷한 시기다.

    일본은 선진국으로 시작하는 때에 조선은 안동김씨 대원군 민비 등의 권력다툼으로 패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다산선생이 강진 유배 중에 쓴 책이 무려 천 여권, 그중에서 “경세유표(經世遺表)”라는 책은 참고자료에서 기존 제도들의 모순에 대한 뼈아픈 통찰과 지적을 남기며 당시 조선의 현실에 맞도록 정치, 사회, 경제 제도를 개혁하는 부국강병을 이루는 데 목표를 두자는 내용의 국정개혁을 담은 중요한 책이다.

    일본은 선진국의 깃발을 달고 대륙을 넘볼 때에 조선은 권력 다툼으로 다산을 강진으로 귀양 보내 '앉은뱅이'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사람은 큰 슬픔을 당하면 슬피 운다. 울음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더 큰 슬픔을 당하면 헛웃음이 나온다.

    하여, 허~ 허! 혼자 웃는다.
     다산초당(茶山艸堂)은 단순히 강진만 바다가 넓게 펼쳐진 아름다운 관광 유적지라 생각하면 안된다.

    한 인생의 당찬 포부가 당쟁으로 무참히 짓밟힌 한맺힌 곳이다. 그렇다고 '구천(句踐)이 오(吳)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할 수 있는 다산초당 (茶山艸堂)도 아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고향인 경기도 광주(廣州)<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마재>에 '실학박물관'이 있다.

    여기에 다산의 생가 당호(堂號)를 '여유당(與猶堂)'이라 했다.
    다산 선생이 강진 귀양이 풀리고 바로 고향으로 가서 '여유당(與猶堂)'이라 당호를 붙이고 돌아가실 때까지 '숨도 크게 안 쉬고 살았다'고 한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여유당(與猶堂)'은 노자(老子) 도덕경의 한 구절로 마치 코끼리가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산다는 뜻이다.

    이렇게 한 시대의 위인(偉人)이 사라져 갔다.
    이 땅의 지겨운 당파 싸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니 
    허~허~허~
    언제나 정신 차리려나!
    소똥도 아깝다!

    犬糞食衛(견분식위 : 개똥이나 쳐먹어라) 
    개똥이나 쳐먹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제발 더 이상 국민 팔지  말라!
    후안무치도 정도가 있어야지!

    파렴치한(破廉恥漢) 어둠의 자식들은 제발 정치판을 떠나거라.
    수신제가(修身齊家)나 하라.
    다시는 아예 정치판에 나설 생각 말라.

    민심이 곧 천심임을 깊이 새겨라!!!
    썩은 정치인, 쓰레기 언론사, 함량미달 기레기 언론인도 이 땅에서 하루 속히 사라져야 한다.

    "걸레는 빨고 빨아도 걸레거늘"
    오늘도 허허~허!~ 또 웃는다.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籜翁)·태수(苔叟)·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요한. 시호 문도(文度). 광주(廣州)(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출생이다.

    1776년(정조 즉위) 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承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李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장기(長鬐)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사례가식(四禮家式)》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

     

     

    정약용 연보 (1762.6.16~ 1836.2.22)

     

    1762 6월 16일 광주(현 경기 남양주시)에서 출생.
    1776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1783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
    1789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 탄핵으로 해미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나 지평으로 등용.
    1792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수원 수축에 기여.
    1794 경기도 암행어사로 활동.
    1799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모함을 받아 사직.
    1801 정조 사망 후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
    1818 《목민심서》 완성.
    1836 2월 22일에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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