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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 공개] 박삼중 스님이 털어놓은 김희로의 일본인 납치사건 ‘김의 전쟁’ 내막(하) - 장만호 작가자료실 2022. 7. 7. 21:13
▲ 김희로의 영구 귀국 신문 보도. ©브레이크뉴스
[편집자 주]일본 내의 한국인 차별 철폐를 외치며 인질극을 벌였던 사건인 소위 '김의 전쟁' 의 주인공 '김희로' 씨를 석방 우리나라에 귀국시켜 임종까지 보살핀 박삼중 스님은 '김의 전쟁'을 아래와 같이 털어놓았다. 그 비화를 공개 한다.
1999년 9월 7일 재일동포 무기수 김희로(65) 씨는 일본 형무소에서 석방된다. 미결수로 구금된 기간까지 31년 만의 석방이다. 김 씨는 석방과 동시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 씨의 품에는 어머니의 유골함이 들려 있었고, 삼중 스님은 김 씨 노모의 영정을 들고 있었다. 삼중 스님은 김 씨 노모에게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재일교포 김희로 씨는 1968년 일본의 한 술집에서 "더러운 돼지새끼, 조센징" 이라며 멸시한 일본인 야쿠자 2명을 총으로 죽이고 모도가와네 온천 후미여관에서 인질극을 벌인 '김희로 사건' 의 주인공이다. 김 씨는 투숙객 13명을 인질로 잡고 일본 경찰과 대치하다 88시간 만에 검거됐다. 체포 당시 김 씨는 혀를 깨물어 자결을 시도했지만 실패,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24년을 복역했다.
김 씨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고 삼중 스님은 김 씨가 투옥된 지 20년쯤 지났을 때 김 씨와 처음 만났다 한다. 삼중 스님을 돕는 법무부 인사가 일본의 법무대신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어렵게 면회가 이루어졌지만 김 씨는 감옥에서 기독교에 귀의했기 때문에 삼중 스님은 교화 목적이 아닌 일반 면회로 그를 만날 수 밖에 없었다. 어렵사리 김 씨와 면회를 했지만 그는 마음 열기를 거부했다. 삼중 스님은 김 씨의 어머니와 요양원에서 같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깜짝 놀라며 김 씨는 어머니 사진을 가슴에 안고 오열했다.
▲ 김희로 씨 영구 귀국 환영 장면. ©브레이크뉴스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기 전까지는 매일 면회를 오셨다"며 "요양원과 멀리 떨어진 구마모토 형무소로 이감된 후에는 몇 년째 뵙지 못해 어머니가 너무나 그립다" 며 울먹인다.
삼중 스님은 김 씨 어머니와 한 약속을 잊지 않고있었다. 한국과 일본을 드나들며 김 씨 구명에 나선 삼중 스님은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김 씨 석방운동을 시작했다. 1990년 10만명 서명을 시작으로 김희로 가석방을 위한 서명운동 결과를 모아 세 차례 일본 규슈 갱생보호위원회와 일본 법무성에 보냈다. 수만 명의 서명이 담긴 석방 청원서는 효력이 있었다. 삼중 스님은 언제든지 김 씨를 특별접견 할 수 있게 됐다. 삼중 스님은 그렇게 수 년 간 김 씨와 면회하며 기록을 남겼다. 어느날 일본 대검 검사이자 교정국장이 삼중 스님을 찾았다.
"스님 이제는 김희로를 석방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일본 법무성은 김 씨의 신원 보증인이자 신병 인수자로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김 씨를 한국으로 데리고 갈 것을 제시했다. 일본 입국 영구 불허, '추방' 이었다. 교정국장은 "일본 형무소는 적법한 재판절차를 거쳐서 형을 확정지은 것이다.
그러니 김 씨가 한국에 가서도 일본을 험담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가야한다." 고 덧붙였다.
삼중 스님은 일본 교정국장에게 약속을 했다.
▲ 김희로 씨 모친의 장례식 장면. 중앙은 박삼중 스님. ©브레이크뉴스
김 씨가 출소를 1년쯤 앞둔 1998년 김 씨의 노모는 꿈속에서도 염원하던 아들의 석방을 보지 못하고 92세로 요양원에서 숨을 거뒀다. 김 씨의 노모는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의식이 거의 끊어진상태였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아들 이름 '희로'를 불렀다 한다. 삼중 스님은 아들과 함께 한국에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고인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삼중 스님은 석방 소식을 전하러 김 씨를 바로 만나야 했다. 허나 실제 석방까지는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김 씨는 법무성 조건을 듣고 다른 조건을 달았다. 자신이 일본을 떠나기 전 어머니 묘소가 있는 곳에 3일간 머무르며 참배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김 씨는 그의 조건이 허락되지 않는 한 일본 형무소에서 평생 살겠다고 선언했다.
일본 법무부 입장에서는 일본에서 머무르는 3일간 또 다시 인질극이 일어날 지 모르는데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 딱 잘라 거절했다. 또 일본 야쿠자들이 김희로가 나오면 복수하겠다고 벼르고 있기에 석방과 동시 공항으로 이송한다고도 했다. 그러자 김 씨는 삼중 스님에게 어머니 유골과 함께 한국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으나, 이번에는 김 씨 어머니가 재가한 뒤 낳은 형제들이 제동을 걸었다. 의붓형제 중 첫째 동생은 "김희로를 우리 가족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형무소를 드나들며 평생 어머니를 괴롭힌 김 씨에게 어머니 유골을 맞길 수 없다고 단호한 입장을 전해왔다. 삼중 스님은 일본어 통역과 함께 밤새 김 씨 의붓동생을 설득했다. 결국 분골해서 반만 한국으로 가져가는 것으로 최종 합의했다.
실제로 일본 야쿠자들은 김 씨가 가석방된다는 소식을 듣고 김 씨를 죽이겠다고 나섰다. 김 씨는 물론 석방운동을 주도한 삼중 스님까지 죽이겠다는 협박 편지가 끊이질 않았다. 김 씨가 죽인 야쿠자는 당시 지방 조직의 두목이었지만 그 사이 일본 3대 조직으로 커져서 전국적인 규모의 범죄 집단이었다. 때문에 일본 법무성은 김 씨의 석방 일정을 철저히 비밀로 했다. 삼중 스님은 김 씨의 출소 때 입을 방탄복까지 마련했다. 방탄조끼를 입은 삼중 스님과 김 씨는 비밀리에 공항으로 바로 이송됐다.
▲ 박삼중 스님과 일본인 여관 주인(왼쪽). ©브레이크뉴스
김 씨는 한국과 일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귀국했다. 부산에 정착한 김 씨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기부금을 내는 등 모금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미 귀국 당시 71세 고령이었던 김 씨는 후견인이 필요했다. 삼중 스님은 김 씨가 감옥에서 얻은 전립선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약 12년 간 김 씨의 생활비를 지원했다. 김 씨는 죽기 전 삼중 스님께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 날도 김 씨의 생활비를 주는 날이라 약속 장소로 나가려는데 김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스님, 제가 지금 몸이 몹시 힘듭니다. 걸을 수가 없어서 그러니 제 집으로 좀 와 주세요" 그가 사는 집으로 찾아갔는데 그는 누운 채로 일어나질 못했다.
"스님이 아니었으면 어찌 제가 조국에 돌아와 10년을 넘게 동포들과 살다갈 수 있었겠습니까? 참 고마웠습니다. 참회합니다. 용서해주세요" 삼중 스님은 그의 마지막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한다. 김 씨의 유언에 따라 유골의 반은 김 씨 아버지의 고향에 절반은 어머니의 유골이 있는 일본 땅에 전해주고 싶었으나 김 씨의 첫째 의붓동생은 유골을 합장하지 않겠다고 해서 대신 여동생이 김 씨의 유골을 거두었다. 삼중 스님은 김 씨의 유골을 조금 남겨서 그가 인질극을 벌인 후미여관에 뿌렸다. 후미여관 주인은 삼중 스님께 김희로가 준 시계라며 스님께 드리고 싶다고 내 준다.
인질극 당시 김희로가 여관을 어지럽혀 미안하다며 시계를 주었다고 했다. 삼중 스님은 김 씨의 유골을 후미여관 현장에 뿌리면서 "이제 김의 전쟁은 끝났다" 고 읊조렸다고 한다.(끝).
2022.7.7 브레이크뉴스 haeun5709@hanmail.net
▲ 한국에 영구 귀국했던 고 김희로 씨. ©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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