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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방연의 ‘천만리 머나먼 길에 …
    자료실 2020. 4. 14. 09:22

     

     

     

    못부친엽서한장 : 네이버 블로그

    시조시인·평론가·서예가,중부대명예교수 *텍스트·사진 인용시 반드시 출처 명기,스크랩시 덧글

    blog.naver.com

    왕방연의 ‘천만리 머나먼 길에 …’

    석야 2019. 2. 21. 23:21

     

     

    국문학자가 들려주는 시조 이야기

    왕방연의 ‘천만리 머나먼 길에 …’

     

     

    석야 신웅순

     

    세조 3년 1457년 6월 21일이었습니다.

    “상왕을 노산군으로 강봉하고 강원도 영월 땅으로 보내노라.”

    세조의 지엄한 어명이 떨어졌습니다. 사육신이 옥사한 지 1년만이었습니다.

    2년 전의 양위식도 이 때쯤이었습니다.

    “해마다 6월이면 끔직한 일이 벌어지는구나.”

    단종은 영월 땅으로 다시는 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나야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충성을 바치다 의롭게 죽어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여섯 신하들 그리고 김문기, 수많은 친인척들과 자신을 끝까지 따르다 죽은 신하들의 얼굴들이 떠올랐습니다.

    “나를 위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을 안고 이제는 귀양살이까지 가야 하다니….”

    단종은 추연히 뒤돌아 서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조는 내관 안로에게 화양정에 나가 노산군을 전송하도록 하였습니다.

    “상감마마 편히 가옵소서.”

    안로는 눈물이 앞을 가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성삼문의 역모를 알고도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나의 죄도다.”

    “숙부에게 고맙다고 이르게.”

    “망극하여이다.”

    노산군은 의연했습니다.

    2년 전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은 대비로 봉해진 송씨와 함께 창덕궁에서 외롭고 쓸쓸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사육신 옥사 후에는 세조의 아우인 금성대군 궁으로 유폐되었습니다. 대비의 친정 부모는 단종을 다시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하여 있지도 않은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습니다. 궁 주변은 군사들로 삼엄했으며 개미 새끼하나 얼씬 거리지 못했습니다. 단종과 대비 송씨는 하루하루를 가슴을 졸이며 살았습니다.

    단종의 나이 이제 겨우 열여섯 살, 부인 송씨와 결혼한 것은 미처 4년도 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지옥 같은 궁에서도 쫓겨나고 사랑하는 부인 송씨와도 생이별해야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신첩더러는 어찌 살라하고 혼자서 길을 뜨십니까?”

    “미안하오. 비마마.”

    어려서는 어머니의 애정을 모르고 자랐고 자라서는 아버지 마저 잃은 단종을 그래도 남편이라고 하늘처럼 받들어준 참으로 고마운 아내, 대비 송씨였습니다.

    “소첩도 따라가겠나이다. 마마…”

    부인 송씨는 봄비 같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습니다. 단종은 더는 참지 못하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습니다.

    “여봐라. 차비를 서둘러라. 강제로 끌어 모시어라.”

    “고맙소. 부인. 부디 자알 계시오.”

    이 한마디가 이승에서의 대비 송씨와는 마지막 말이 되었습니다.

    단종은 그동안 수 많은 외로움과 슬픔을 견뎌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송씨 부인이 옆에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부인 송씨는 단종에게는 다정한 누님 같기도 하고 가슴 따뜻한 어머니 같기도 했습니다. 송씨의 돌봄이 없었더라면 단종은 엄청난 슬픔을 감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랑하고 의지하던 아내 송씨와도 이제는 생이별을 해야했습니다. 돌봐 줄 가족하나 없는 낯설고 물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단종의 호송 책임자는 첨지중추부사 어득해였고 호송 병사의 수효는 50명, 수행 금부도사는 왕방연이었습니다.

    단종 일행은 원주, 제천을 거쳐 며칠 후 영월 청령포에 도착했습니다.

    단종이 유배된 곳은 영월읍에서 삼십리를 더 들어가는, 삼면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아래로는 서강이 휘감아 흐르는 깊고 깊은 산중, 청령포였습니다. 강변 옆은 깎아 지른 듯한 낭떠러지기 바위가 가로 막고있어 배가 없이는 건너 갈 수 없는 감옥이나 다름 없는 곳이었습니다. 사방은 산과 낭떠러지기와 강물뿐이었습니다. 짐승들과 산새들의 울음소리만이 들려올 뿐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궁궐과 정순왕후 소식을 소문으로도 들을 수 없는 천혜의 육지고도였습니다. 지붕은 칡덩굴로 얹었고 벽은 통나무로 얽어 만든 집, 바로 거기가 단종이 귀양살이 할 곳이었습니다. 시위 한 사람에 내시와 궁녀 두서넛 뿐 의복과 음식도 때를 맞출 수 없는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비참한 생활이었습니다.

    단종은 산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기곤했습니다. 한양에 남겨진 정순황후를 생각하며 하나하나 돌로 망향탑을 쌓아 올렸습니다. 때로는 소나무 둥치에 앉아 서울쪽을 바라보며 오열하곤 했습니다.

    단종을 호위한 왕방연 일행이 영월을 떠났습니다.

    의금부 도사 왕방연은 단종만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왕방연은 강물이 내려다 보이는 곡탄 언덕에 앉아 견딜 수 없는 그리움에 단장가 를 읊었습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자시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사모하는 님을 두고 와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마음 같아 울며 밤길을 가는구나. 읊고난 왕방연은 단종에 대한 곡진한 그리움에 멍하니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한달이 못되어 큰 장마가 졌습니다. 영월의 동강과 서강이 넘쳐 청령포가 범람하자 영월부사는 단종을 영월부 동헌의 관풍헌 객사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단종은 자규루에 올라가 먼 산을 바라보며 향수에 젖곤 했습니다. 밤이면 소쩍새 울음소리를 들으며 베갯 머리를 적시곤했습니다.

    달빛이 쏟아지는 어느날 밤, 단종은 자규루에 올랐습니다. 때마침 소쩍새가 소쩍소쩍 구슬피 울었습니다. 부인 송씨가 소쩍새가 되어 자기를 찾아와 우는 울음 소리 같았습니다. 단종은 눈물을 씻으며 시조 한 수를 읊었습니다.

     

    달 밝은 밤 소쩍새 슬피운다

    시름 못 잊어 자규루에 기대었네

    네 울음 슬피우니 내 듣기 괴로워라

    네 울음 아니더면 수심도 없었을 것을

    이르노니 세상 근심 많은 사람들아

    춘삼월 자규루에는 부디 오르지 마소.

     

    영월 백성들은 이 시를 듣고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노산군은 자신의 처지를 이 시에 담아 고통을 참아가며 외로움을 이겨냈습니다. 많은 촌민들은 임금이 서성거렸던 누각 아래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습니다. 별미를 해다 바치는 농부도 있었고 날마다 음식을 만들어 바치는 농부도 있었습니다.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중에서 쫓겨나와

    외로운 몸 그림자 푸른 산을 헤매누나

    밤마다 자려해도 잠들 길 바이없고

    해마다 한을 끝내려 애를 써도 없어지지 않는구나

    울음소리 끊어진 새벽 산엔 어스름 달빛이 비치고

    봄 골짝에 피 토한 듯 떨어진 꽃 붉구나

    하늘은 귀가 먹어 이 내 하소연도 못 듣는데

    어쩌다 서러운 이내 몸 귀만 홀로 밝았는가

     

    단종은 때때로 자규루에 올라 시를 지으며 시름을 달래곤했습니다.

    우울하고 적막한 세월도 그나마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457년 10월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숙부 금성대군이 그만 큰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새로 부임해온 순흥 부사 이보흠과 함께 장차 세조를 내쫓고 단종을 다시 임금으로 세우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만 내부 관노의 고자질로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금성대군은 사약을 받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세조 공신들은 일제히 들고 일어났습니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사건은 결국 노산군의 죽음에 기름을 끼얹져준 셈이 되었습니다.

    “노산군을 진작 없애야 했습니다. 그를 살려 둠으로써 이같이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옵니까.”

    정인지 ,정창손, 한명회가 노산군을 죽이자고 입을 모아 주장했습니다. 세조도 마침내 단종을 없애기로 결정했습니다.

    “10월 24일 유시를 기하여 노산군에게 사약을 내리노라.”

    어명이 내렸습니다. 얄궂은 운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왕방연이 유배길의 단종을 호송했고 두 번째는 의금부 도사가 되어 사약을 들고 또 다시 영월로 향했습니다.

    “잠시 멈추어라.”

    우루루 한떼의 인파가 멈추었습니다.

    “저 개울가에서 잠시 쉬었다가자.”

    금부도사와 자장들이 말에서 내려 개울가로 내려갔습니다. 50여명의 나졸들은 뿔뿔이 흩어져 여기저기에서 다리쉼을 하고 있었습니다.

    넉달 전 단종 임금을 영월 땅에 두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왕방연은 이 바위 에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서 시조 한 수를 읊었습니다. 전에 지었던 시조 한 수를 다시 되뇌었습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은 님 여의옵고…”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혼 나간듯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도사 영감, 너무 지체되는 듯합니다.”

    “알았느니라.”

    왕방연은 사약을 들고 차마 단종의 처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머뭇대자 나장이 재촉했습니다.

    “어명이오.”

    단종은 금부도사를 맞이하기 위해 곤룡포를 입고 익선관을 쓴 다음 정좌했습니다. 까닭을 물었습니다.

    “금부도사가 또 어인 일인가?”

    한 나졸이 돗자리를 폈습니다. 노란 은행잎 몇 장이 돗자리 위에 투욱 떨어졌습니다. 한 점 바람이 은행잎을 쓸고 지나갔습니다.

    “금부도사, 나를 보고 죽으라는 것이냐?”

    왕방연은 약사발을 뒤로 숨긴 채 뜰에 엎드려 흐느낄 뿐이었습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졌습니다.

    “유시오, 유시!”

    시간이 되었다고 재촉하는 나장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왕방연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엎드려있었습니다.

    단종 곁을 시중들던 공생이 공을 세워볼까 금부도사도 하지 못하는 일을 자청했습니다. 공생은 활시위로 올가미를 만들었습니다. 문틈 뒤로 단종의 목을 걸어 올가미를 힘껏 잡아 당겼습니다. 단종은 단말마 같은 짧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후 천근의 몸을 부렸습니다. 1457년 10월 24일 유시 단종의 나이 17세였습니다. 단종은 후사도 없이 한 많은 생을 이렇게 마감했습니다. 시신은 그대로 강물에 던져졌습니다.

    그날 밤 거센 폭풍우가 몰아쳤습니다. 검은 안개비로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단종을 죽인 공생은 몇 발자국 걷다 피를 토해 죽었습니다. 단종을 모시고 있던 궁녀들도 강물에 몸을 던졌습니다. 단종과 궁녀의 시신이 강물에 떠 있었으나 수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호장 엄홍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단종의 죽음을 듣고 대성 통곡을 했습니다. 엄홍도는 관을 갖추어 노산군을 묻어주려고 했습니다.

    “역적의 시체를 묻어두었다가 멸문지화를 당하면 어찌하려고 이러시오?”

    식구들이 말렸습니다.

    “옳은 일을 하고 화를 당한다면 나는 달게 받겠소.”

    엄홍도는 이튿날 아전들을 거느리고 시신을 수습하여 동을지, 지금의 장릉에 장사를 지내 주었습니다.

    새벽빛이 산 언덕을 내려와 청회색으로 곱게 물들였습니다. 그 때까지 상제들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먼동이 트는 새벽 산은 적막했습니다.

    이후 영월에 부임하는 부사들은 첫날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나갔습니다. 어느 누구도 영월 부사로 가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이러한 소문은 궁중은 물론 조선 팔도에 이르기까지 급속히 퍼져나갔습니다.

    영월 부사를 자청한 이가 있었습니다. 부임 첫날이었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관복을 차려 입고 밤늦게까지 관헌 마루에 앉아있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한바탕 바람이 휘익 불더니 순간 불이 꺼졌습니다. 대들보가 흔들리고 선반 위의 물건들이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잠시 후 소년 혼령이 수십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뚜벅 뚜벅 동헌 마루로 올라갔습니다. 단종의 영혼이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부사는 동헌 마루로 내려가 예우를 올리고 하회를 기다렸습니다.

    “나는 공생의 활시위에 묶여 목숨을 잃었다. 목이 답답하여 견딜 수 없으니 이 줄을 풀어 달라.”

    “저는 임금님의 옥체가 어디인지 모르옵니다.”

    “엄홍도라는 사람을 찾아 물어보거라.”

    한 바탕 바람이 불더니 혼령들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웅성웅성 장례 준비에 바빴습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부사가 관복을 차려입고 동헌에 고추 앉아있었습니다. 엄홍도를 불렀습니다. 매장한 곳을 파보니 용안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목에는 가느다란 활시위가 감겨져 있었습니다.

    부사는 단종의 제사를 정중히 모셨습니다. 영월은 이후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왕방연.

    생몰 연대 미상으로 조선 초기 문신입니다. 한 번은 단종의 유배길을 호송했고 또 한 번은 사약을 들고 심부름 했던 금부도사였습니다. 그는 심부름꾼에 불과했습니다. 심부름꾼의 단장가 한편이 수백년이 흐른 지금에도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살았던 단묘유지비와 어가,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노산대,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돌을 쌓았다는 망향탑, 외인을 접근을 막기 위해 영조가 세운 금표비,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본 관음송, 사약을 받은 자리 관풍헌, 단종이 자규시를 읊었다는 자규루, 엄홍도의 충절을 새긴 정려각이 있습니다. 영월읍에는 장릉이 있고 청령포에는 왕방연 시조비가 곡탄 언덕에 세워져 있습니다.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노래로도 불리워지고 있는 역사의 비화가 남긴 자취들입니다.

     

     

    [출처] 왕방연의 ‘천만리 머나먼 길에 …’|작성자 석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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