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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및 배위 묘제 봉사나의 이야기 2020. 11. 8. 19:33
과천 문원동 소재 오산 차천로(車天輅) 및 배위 묘제 봉사
2020.11.8.(음 9.23) 경기도 과천시 문원동 소재 오산공 차천로 선조 및 정부인 전주이씨 묘역에서 시향을 모셨다. 금년에는 코로나19의 장기화로 20여 명의 단촐한 인원이었지만 오산 선조님 산소를 찾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신 고 이용진님의 자제이신 이영구(李榮九, 직전 과천시 문화원장•현 상임고문, 아헌관 봉사)님과 방정환연구소 소장 장정희(張貞姬) 문학박사님께서 특별히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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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천로(車天輅, 1556년 ~ 1615년) 선조 약사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이다. 본관은 연안.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이다.
화담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하였다. 선조10년(1577년) 문과에 급제하여 개성부교수(開城府敎授)를 지냈고, 1583년(선조 16)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6년 정자(正字)로서 고향 사람 여계선(呂繼先)이 과거를 볼 때 표문(表文)을 대신 지어주어 대리시험으로 장원급제시켰다가 나중에 발각되어 명천에 유배되었다가 1588년 문장의 재주가 있어서 용서받고 승문원에 종사하였다.
1589년 통신사 황윤길(黃允吉)과 함께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 때 4,000∼5,000수(首)의 시를 지어 일본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문장이 수려하여 명나라로 발송되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그가 작성하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平壤城) 수복(收復) 로포문(露捕文) 등으로 문명(文名)이 명나라에까지 떨쳐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다. 특히, 명사(明使)들이 문장의 속작(速作)을 실험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시에 거침없이 수응(酬應)하여 이름을 더욱 떨쳤다. 1792년 정조 때 왕명으로 그의 저서 오산집(五山集)을 간행하여 반포하게 하였다.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거쳐 1601년 교리가 되어 교정청(校正廳)의 관직을 겸임했고, 광해군 때 첨정(僉正), 봉상시정(奉常寺正)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의 분조(分朝)를 수행한 공로로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 三等)에 책록되었다. 한시(漢詩)에 뛰어나 글씨의 한석봉(韓石峯), 문장의 최립(崔岦)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어졌고, 문장에도 뛰어나 아우인 차운로(雲輅), 성균진사 마상원(馬尙遠)과 함께 '양차일마(兩車一馬)'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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