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한비문학 2007년12월호 재미있는 시평_<반칠환 시인의 ‘자벌레> 外
    카테고리 없음 2022. 1. 1. 21:11

    신광철 시인

    월간 한비문학 편집 고문

     

    자벌레

     

    한심하고 무능한 측량사였다고 전한다. 아무도 저이로부터 뚜렷한 수치를 얻어 안심하고 말뚝을 꽝꽝

    박거나, 울타리를 치거나, 경지정리를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딴에는 무던히 애를 썼다고도 한다.

    뛰어도 한 자, 걸어도 한 자, 슬퍼도 한 자, 기뻐도 한 자가 되기 위해 평생 걸음의 간격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저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따뜻하고 유능한 측량사였다고도 전한다. 저이가 지나가면 나무뿌리는 제가 닿지 못하는 꽃망울까지의

    거리를 알게 되고, 삭정이는 까맣게 잊었던 새순까지의 거리를 기억해 냈다고 한다. 저이는 너와 그가

    닿지 못하는 거리를 재려 했다고 한다. 재면 잴수록 거리가 사라지는 이상한 측량을 했다고 한다.

    나무 밑둥에서 우듬지까지, 꽃에서 열매까지 모두가 같아졌다고 한다. 새들이 앉았던 나뭇가지의

    온기를 이파리 떨어진 상처의 진물을 온 나무가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저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저이가 재고 간 것은 제가 이륙할 열 뼘 생애였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늘그막엔 몇 개의 눈금이 주름처럼

    생겨났다고도 한다. 저이의 꿈은 고단한 측량이 끝나고 잠시 땅의 감옥에 들었다가, 화려한

    별박이자나방으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고 한다. 별과 별 사이를 재고 또 재어 거리를

    지울 것이었다고 전한다.

    키요롯 키요롯-느닷없이 날아온 노랑지빠귀가 저 측량사를 꿀꺽 삼켰다 한다. 저이는 이제 지빠귀의

    온몸을 감도는 핏줄을 잴 것이라 한다. 다 재고 나면 지빠귀의 목울대를 박차고 나가 산에 가 닿는

    메아리를 잴 것이라 한다. 아득한 절벽까지 지빠귀의 체온을 전할 것이라 한다.

     

    <반칠환 시인의 ‘자벌레>

     

     

    하찮아 보이는 일상에서 번뜩이는 깨달음을 건져 올리는 시인

     

     

     

    ‘새는 노래하는 의미도 모르면서 노래를 한다’는 송창식이라는 가수의 노래가 있습니다.

    노래하는 의미도 모르면서 지저귀는 것이 노래가 되는 경지는 높은 경지지요. 다시 말하면

    살아가는 일이 그대로 깨달음의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인 게지요. 성인의 경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있음이 고스란히 기쁨이 된다면 성공한 삶이겠지요. 적어도 내가 살아있음이 누군가에게

    따뜻한 기쁨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황송스럽지요.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이 지구의

    한 부분을 따뜻하게 하는 일이라면 그래도 살만 하지요. 내가 가을날 떨어진 마당을 쓸면서

    이 지구의 한 모퉁이가 나의 작은 정성으로 깨끗해졌다고 생각하면 향기로운 일이지요.

    삶은 그래야합니다. 삶은 향기로워야 하고 아름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한 일로 지구라는

    공동체에서 사는 생명이 아름다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반칠환 시인의 <자벌레>라는 시에서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세상을 재는 자가 되는 자벌레를 통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심하고 무능한 측량사였다고 전한다.>고 시작하는 <자벌레>라는 시에는 동화가 한편 들어있습니다.

    자벌레의 인생과 자벌레의 정체성이 보입니다. 자벌레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소록소록 사람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반칠환 시인은 설득하려 하지 않고 있는 현상 그대로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그러면서 커다란 울림 하나를 던집니다. 말로 말하지 않고

    있음을 있는 대로 적어놓고서 깨달음을 일깨우는 성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시라기에는 동화적인 요소가 내면에 자리 잡은 시지요.

     

    뛰어도 한 자, 걸어도 한 자, 슬퍼도 한 자, 기뻐도 한 자가 되기 위해 평생 걸음의 간격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자벌레는 생을 일구어가는 일이 세상을 재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치로 재는지, 측량을 위한 길이의

    단위로 재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답을 피하고 있습니다. <뛰어도 한 자, 걸어도 한 자, 슬퍼도 한 자,

    기뻐도 한 자>라는 서술이 그러함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평생 걸음의 간격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는 부분에서 깨달음이 보이는 게지요. 자벌레는 도인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생로병사가

    흐트러짐 없이 한자였던 게지요. 그럼에도, 길이의 단위로서 한자인지, 깨달음의 경지로서 한 자인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이러한 모호함은 이 시가 가진 동화적인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기 위한 장치인지도

    모릅니다.

    반칠환 시인의 시에서는 각覺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 시 말고도 다른 시에서 그러한

    자질이 보이거든요. 특히 <한평생>이라는 시에서 번뜩이는 깨달음에 대한 강인한 느낌이

    이 시에서도 느껴지지요.

     

    한심하고 무능한 측량사였다고 전한다.

    따뜻하고 유능한 측량사였다고도 전한다.

     

    자벌레라는 측량사에 대한 반칠환 시인의 정의지요. ‘전한다’는 말에서 자신의 정의는 슬쩍 피해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시인이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발상은 아닌듯합니다.

    시가 경직될 수도 있고, 전한다는 말이 곧 시인의 정의인데 굳이 상상력의 보폭을 줄일 필요가 없지요.

    ‘한심하고 무능한’ 측량사는 다시 ‘따뜻하고 유능한’ 측량사가 되고 있습니다. 한심하면서 따뜻할 수는

    있지만 무능하면서 유능할 수는 없거든요. 반칠환 시인의 실수였는지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시에서 이러한 부분의 어긋남이 그리 중요하지 않지요. 논문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어긋남이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받아들여지는 공간이 문학이거든요. 그리고 이 시는

    동화적인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는 시이기 때문에 그냥 슬쩍 넘어가도 될 듯합니다.

    그리고 ‘한심하고 무능하다거나 따뜻하고 유능한‘ 측량사는 <저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고 하는 깊은 경지를 이야기하기 위한 일상성을 끌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무난하게 받아들여집니다.

    자벌레가 잰 것은 이 세상의 많고 적음을 잰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짧고 긴 것을 잰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에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상상력을 재고 다닌 게지요. 꿈의 길이를 재고 다닌 것이지요.

    문학은 그러한 데서 사람을 행복하게 하거든요. 꿈을 꾸는 만큼 세상은 넓어지고 아름다워지지요.

    반칠환 시인이 재고 싶어 한 것은 생명이 가슴의 안뜰에 숨기고 있는 것들이지요.

    기쁨이란 보물이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들이지요. 한 번 볼까요.

     

    나무뿌리는 제가 닿지 못하는 꽃망울까지의 거리를 알게 되고, 삭정이는 까맣게 잊었던 새순까지의

    거리를 기억해 냈다고 한다. 저이는 너와 그가 닿지 못하는 거리를 재려 했다고 한다.

    재면 잴수록 거리가 사라지는 이상한 측량을 했다고 한다. 나무 밑둥에서 우듬지까지,

    꽃에서 열매까지 모두가 같아졌다고 한다. 새들이 앉았던 나뭇가지의 온기를 이파리 떨어진 상처의

    진물을 온 나무가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문학의 특질 중 가장 빛나는 부분이 어려운 말로 하면 인간성 옹호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 인간성 옹호라는 말에는 사람의 존재가 아름다워져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거든요.

    본질을 캐는 것이 아름다움이 아니지요. 사람을 해부해서 아름다워질 수 없습니다. 식물을 해부해서

    아름다워질 수 없습니다. 가진 것을 그대로 보듬어 안는 것이 진정 아름다움이지요.

    서로 끌어안았을 때 따뜻함을 느끼라고 사람의 피는 온혈이지요. 이 온혈에는 배려와 이해해주는

    마음이 먼저여야 하거든요. ‘재면 잴수록 거리가 사라지는 이상한 측량’은 보이지 않은 것들을 쟀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 나무 밑둥에서 우듬지까지, 꽃에서 열매까지 모두가 같아졌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새들이 앉았던 나뭇가지의 온기를 이파리 떨어진 상처의 진물을 온 나무가

    느끼게 되었다’고 하는 게지요. 온기라는 기쁨도 이파리 떨어진 상처라는 아픔도 같이 느끼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벌레의 소망은 한 발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이가 재고 간 것은 제가 이륙할 열 뼘 생애였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늘그막엔 몇 개의 눈금이

    주름처럼 생겨났다고도 한다. 저이의 꿈은 고단한 측량이 끝나고 잠시 땅의 감옥에 들었다가,

    화려한 별박이자나방으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고 한다. 별과 별 사이를 재고 또 재어

    거리를 지울 것이었다고 전한다.

     

    자벌레의 소망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자벌레 자신의 생애는 힘이 들었을지 몰라도 자벌레의 꿈은

    아름다웠습니다. ‘고단한 측량이 끝나고 잠시 땅의 감옥에 들었다가, 화려한 별박이자나방으로

    날아오르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름다웠습니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별과 별 사이를 재고 또 재어

    거리를 지울 것’이었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밖에 없습니다. 반칠환 시인은 무지개를 따러간 소년이었나

    봅니다. 아직도 따지 못하고 있는 것을 확실합니다. 아직도 무지개는 뜨고 있으니까요. 시인이 꿈을

    꾸는 것이 죄가 된다면 죄인이 아닌 시인은 없을 것입니다. 나이 들어도 철들지 않는 어른이 시인이지요.

    그 철들지 않은 어른, 시인의 글을 읽는 철든 사람들은 시를 재미없다고 합니다. 시는 철들지 않은

    아이나 철들지 않은 어른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상상력은 철든 사람에게 있어서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거든요. 지상의 기쁨을 재력과 권력의 유무에서

    찾으려는 어른에게서 하늘을 나는 새가 기쁨이기에는 하늘을 바라볼 여유가 없습니다.

    지상에 핀 꽃을 바라보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중요한 일은 모두 돈과 관계되는 일들이거든요.

    꽃이 핀 것은 늘 있어온 것들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는군요. 새들이 군무를 즐기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라는 거지요. 사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기보다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어른들은 철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제 상상력은 더 나아갑니다. 진짜로 허무맹랑한 단계에까지 갑니다.

    반칠환 시인은 철들지 않았음이 확실합니다. 그러기에 시를 쓰는 것이겠지요.

     

    키요롯 키요롯-느닷없이 날아온 노랑지빠귀가 저 측량사를 꿀꺽 삼켰다 한다. 저이는 이제 지빠귀의

    온몸을 감도는 핏줄을 잴 것이라 한다. 다 재고 나면 지빠귀의 목울대를 박차고 나가 산에 가 닿는

    메아리를 잴 것이라 한다. 아득한 절벽까지 지빠귀의 체온을 전할 것이라 한다.

     

    ‘키요롯 키요롯’ 노랑지빠귀가 날아오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의태어가 주는 맛이 별납니다.

    우리 모국어에는 단어가 만들어지면 묘하게도 그 안에 소리가 숨어있습니다. 반면 의태어는 단어

    그 바깥에 소리를 입습니다. 한번 아무런 선입감 없이 느껴보세요, ‘키요롯 키요롯’이라는 단어에는

    어떤 소리가 숨어있고, 어떤 모양새가 숨어있는가를.

    시적 상상력이란 것은 어떻게 보면 우습지요. 자벌레를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먹이로 먹어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자벌레의 꿈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것이라 한다‘는 추측으로 자벌레의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화가 다 된 그 자벌레는 자신을 먹어버린 새, ’지빠귀의 온몸을

    감도는 핏줄을 잴’것이라고 합니다. 다 재고 나면 ‘지빠귀의 목울대를 박차고 나가 산에 가 닿는

    메아리를 잴 것이라 한다. 아득한 절벽까지 지빠귀의 체온을 전할 것이라 한다’고 합니다.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시인의 입을 통해서 들으면서 감동한 사람은 분명 아직도 철들지 않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하나를 말해드리지요. 이 말을 시인에게 하면

    제가 야단맞습니다. 이러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사는 사람은 한결같이 가난하고 생활능력이

    떨어지니 사귀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능력하거든요. 이런 사람과 결혼까지 하면 화려함이나 호강하고는

    동떨어져 살아야 하거든요. 고급옷이나 고급자가용을 타기는 영 그른 이야기가 되지요. 철들지 않은

    어른이라면 상관없습니다. 같이 철이 들지 않아 소년소녀처럼 살 수 있으니 살만 하겠지요.

    인생을 소꿉장난하듯 살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철들은 사람들은 절대로 기피해야 할 사람이

    시인이지요. 반칠환 시인은 199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습니다. 동아일보의 심사평에서,

     

     


     

    세속에 대한 따뜻한 긍정과 함께 결국은 가야 할 초월적 세계에 대한 소박한 두려움이 있다.

    이 시는 시 전체가 소박하다. 지나칠 정도로 단순해 보이기도 하고, 보기에 따라서는 어리숙한 것도

    사실이다. 놀라운 달관과 예리한 감수성이 잠복해 있다.

    는 평을 받았습니다. 충북 청주 출생으로 시집으로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웃음의 힘> 등이

    있습니다. 동화집<하늘 궁전의 비밀> 그리고 시선집 <누나야>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이 있습니다

    <자벌레>라는 시에서 시적 상상력이 동화적인 유형을 가진 것이 동화집의 발간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한 편의 시를 더 볼까요. 느낌이 아주 유사합니다. 신춘문예 등단 평에서 볼 수

    있는 자질이 그대로 드러난 시지요. <자벌레>하고도 아주 유사하고요. ‘세속에 대한 따뜻한 긍정과

    함께 결국은 가야 할 초월적 세계에 대한 소박한 두려움이 있다.’는 평과 함께 ‘놀라운 달관과

    예리한 감수성이 잠복해 있다’는 말에 적극 공감이 가는 시입니다.

     

    요 앞, 시궁창에서 오전에 부화한 하루살이는,

    점심때 사춘기를 지나고 오후에 짝을 만나,

    저녁에 결혼했으면, 자정에 새끼를 쳤고,

    새벽이 오자 천천히 해진 날개를 접으며 외쳤다.

    춤추며 왔다가 춤추며 가노라.

     

    미루나무 밑에서 날개를 얻어 칠일을 산 늙은 매미가 말했다.

    득음도 있었고 지음이 있었다.

    꼬박 이레 동안 노래를 불렀으나

    한 번도 나뭇잎들이 박수를 아낀 적은 없었다.

     

    칠십을 산 노인이 중얼거렸다.

    춤출 일 있으면 내일도 미뤄 두고,

    노래할 일 있으면 모레도 미뤄 두고,

    모든 좋은 일이 좋은 날 오면 하마고 미뤘더니 가쁜 숨만 남았구나.

     

    그즈음 어느 바닷가에선 천 년을 산 거북이가

    느릿느릿 천 년째 걸어가고 있었다.

    모두 한평생이다.

     

    <반칠환 시인의 ‘한평생-속도에 대한 명상 12’>

     

     

    요즘 시에서 보기 드문 덕목을 가진 시입니다. 반칠환 시인의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에

    실린 시인데 부제가 붙어있습니다. ‘속도에 관한 명상 12’라고요. 세상의 속도에 대한 경박성에 넌지시

    말 한 마디를 던지고 싶었나 봅니다. 반칠환 시인은 ‘자벌레’와 ‘한평생’에서 모두 같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동격인 것을 먼저 알아야 이를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나

    봅니다. <뛰어도 한 자, 걸어도 한 자, 슬퍼도 한 자, 기뻐도 한 자>인 자벌레의 세상 재기나 하루살이,

    매미, 칠십 산 노인 그리고 천년을 산 거북이가 산다는 것에는 별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산 세월과는 상관없이 ‘살았다’는 그 귀중한 사실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반칠환 시인은 ‘춤추며 왔다가 춤추며 가노라’는 하루살이의 삶보다는 ‘득음도 있었고 지음이 있었다’는

    매미에 대해서 더 시선을 오래 두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행복을 미루는 칠십을 산

    노인보다는 누려야 할 가치임을 은근히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누구나 눈치챌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가볍고 난해한 것이 주류인 요즘 세상의 시에서 한 발 물러선 시지요. 이 시에서도 ‘자벌레’와

    마찬가지로 이야기가 보입니다. 그래서 읽는 기분도 가볍고 느낌도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아주 편안합니다. 한 번 읽으면 다 느낄 수 있습니다. 한 편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선사나 도인이 제자를 앉혀놓고 이야기하고 있는 광경이 떠오릅니다.

    그만큼 넉넉한 풍경과 받아들임이 따뜻한 시지요.

    산이 하나 마음에 있으니 이미 산은 마음에 들인 주인의 소유지요. 그러한 관조와 깨달음 하나 온전하게

    그려 놓았습니다. 시로 그린 풍경이 참 넉넉합니다. 한편의 동화 같은 모습이 그려지기도 하고,

    선지식 하나 내려놓은 마음이 보이기도 합니다.

    반칠환 시인은 불교적인 사유를 가진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종교로서 불교를 믿지 않을지는 몰라도

    선적인 요소는 가지고 있는 시인입니다. 이야기를 시에 들인 반칠환 시인의 시는 만나는 순간 편하고

    따뜻합니다. 그러면서도 내면이 깊고 넓은 시인입니다. 눈이 깊은 시인을,

    사유의 세계가 넓은 시인을 이 시대에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시가 걸어가는 길이 5월의 들판을 맨발로 걸어가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있는 그대로 만으로도 충분한

    그런 느낌을 아시나요.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바람과 햇살의 풍요로움. 온도는 20도를 넘나드는

    걷기에 적당한 봄길, 그 길을 걷는 기분이 들게 하는 시어들이 시를 만들고 있습니다. 꾸미지 않고

    넘치지 않는 서정으로 행복한 산책길처럼 깨달음의 길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흐뭇한 웃음 하나 베어

    물고 있으면 삶이 주는 선물이 온혈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두 편의 시를 만나 흐뭇했습니다.

     



     

    새해 첫 기적 / 반칠환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