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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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남.사.모-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창립총회자료실 2024. 10. 27. 09:44
(사)남.사.모(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창립총회 및 정기모임 2020. 10. 26(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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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卍海기념관 / 달항아리 展나의 이야기 2024. 10. 6. 09:06
만해기념관(卍海紀念館)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에 있는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기념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내에 있는 만해 한용운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립박물관으로 원래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 있던 기념관을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으로 이전하여 1998년 5월 개관하였다. 기념관은 대지 520평에 지상2층 규모의 전통 한옥 주삼포 건물로 지어졌으며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교육관, 야외 체험실을 갖추고 있다. 경내에 들어서면 '나룻배와 행인'의 시비와 만해의 흉상이 있다. 기념관에는 선생이 사용하던 책과 저술, 3.1 독립선언문 원본, 독립운동 관련 자료와 일화,《님의 침묵》초간본과 180여 종의 판본, 800여 편의 만해관련 연구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한국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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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主戰派) / 최명길(主和派)의 대립과 화해자료실 2022. 11. 22. 17:26
남한산성 ▲ ▼ 조선 인조 언간의 병자호란에서 김상헌(金相憲)은 주전파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최명길(崔明吉)은 주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 두 인물들은 서로 뜻하는 바는 달랐으나 조선을 생각하는 충심 있는 조선의 관료들이었고 김상헌이 최명길의 항소를 찢어버리는 등 많은 대립이 있었으나 병자호란이 끝난 뒤 김상헌은 관직도 받지 않고 청의 연호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의 심양으로 압송됩니다. 그 때 최명길도 명나라에 밀서를 보냈다는 이유로 잡혀와 있었는데, 조선을 대표하는 두 대신은 포로의 신세로 함께 잡혀 있으면서 끝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묵은 오해를 풀게 되는데, 먼저, 김상헌이 시 한절을 읊조리죠. 從尋兩世好(종심양세호) - 조용히 두 사람의 생각을 찾아보니 頓釋百年疑(돈석백년의) -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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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南漢山城) - 4백년 전의 교훈자유게시판 2018. 6. 29. 13:08
1636년 12월 여진족이 일으켜 세운 만주의 대청제국(大淸帝國)이 12만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청은 "군신관계를 맺고 사대를 할 것"을 요구했고, 인조(1595~1649)의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한 채 1만 3천의 군사로 남한산성에서 배수진을 쳤다. 청은 후금(後金) 시절이던 1627년 정묘년에 3만의 병력으로 쳐들어와 강화도로 피신했던 인조에게서 형제맹약을 받아낸 후 병력을 거둔 적이 있었다. 조선은 이 형제맹약을 임시 방편으로만 여겼을 뿐 그후로도 계속 후금을 오랑캐로 여기며 무시했다. 이번에는 선봉장 우문개에 이어 황제를 칭한 청 태종 홍타이지(1588~1643)도 직접 남한산성으로 달려왔다. 명(明)과 요동의 영원성에서 대치중인 상황이었음에도 여전히 명과의 의리를 고집하는 조선을 무릎 꿇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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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삼전도비.석촌호수 / 가락동 비석거리공원나의 이야기 2018. 4. 1. 20:57
서울 삼전도비(서울 三田渡碑, 영어: Samjeondobi Monument, Seoul) 또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에 있는 청나라의 전승비이며 송덕비이다. 병자호란 때 승리한 숭덕제가 자신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요구하여 1639년(인조 17년)에 세워졌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