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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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主戰派) / 최명길(主和派)의 대립과 화해자료실 2022. 11. 22. 17:26
남한산성 ▲ ▼ 조선 인조 언간의 병자호란에서 김상헌(金相憲)은 주전파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최명길(崔明吉)은 주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 두 인물들은 서로 뜻하는 바는 달랐으나 조선을 생각하는 충심 있는 조선의 관료들이었고 김상헌이 최명길의 항소를 찢어버리는 등 많은 대립이 있었으나 병자호란이 끝난 뒤 김상헌은 관직도 받지 않고 청의 연호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의 심양으로 압송됩니다. 그 때 최명길도 명나라에 밀서를 보냈다는 이유로 잡혀와 있었는데, 조선을 대표하는 두 대신은 포로의 신세로 함께 잡혀 있으면서 끝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묵은 오해를 풀게 되는데, 먼저, 김상헌이 시 한절을 읊조리죠. 從尋兩世好(종심양세호) - 조용히 두 사람의 생각을 찾아보니 頓釋百年疑(돈석백년의) -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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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南漢山城) - 4백년 전의 교훈자유게시판 2018. 6. 29. 13:08
1636년 12월 여진족이 일으켜 세운 만주의 대청제국(大淸帝國)이 12만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청은 "군신관계를 맺고 사대를 할 것"을 요구했고, 인조(1595~1649)의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한 채 1만 3천의 군사로 남한산성에서 배수진을 쳤다. 청은 후금(後金) 시절이던 1627년 정묘년에 3만의 병력으로 쳐들어와 강화도로 피신했던 인조에게서 형제맹약을 받아낸 후 병력을 거둔 적이 있었다. 조선은 이 형제맹약을 임시 방편으로만 여겼을 뿐 그후로도 계속 후금을 오랑캐로 여기며 무시했다. 이번에는 선봉장 우문개에 이어 황제를 칭한 청 태종 홍타이지(1588~1643)도 직접 남한산성으로 달려왔다. 명(明)과 요동의 영원성에서 대치중인 상황이었음에도 여전히 명과의 의리를 고집하는 조선을 무릎 꿇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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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삼전도비.석촌호수 / 가락동 비석거리공원나의 이야기 2018. 4. 1. 20:57
서울 삼전도비(서울 三田渡碑, 영어: Samjeondobi Monument, Seoul) 또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에 있는 청나라의 전승비이며 송덕비이다. 병자호란 때 승리한 숭덕제가 자신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요구하여 1639년(인조 17년)에 세워졌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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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丙子胡亂) 主戰派 / 主和派자유게시판 2018. 1. 17. 18:52
조선 인조 언간의 병자호란에서김상헌은 주전파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최명길은 주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이 두 인물들은 서로 뜻하는 바는 달랐으나 조선을 생각하는 충심 있는 조선의 관료들이었고 김상헌이 최명길의 항소를 찢어버리는 등 많은 대립이 있었으나 병자호란이 끝난 뒤 김상헌은 관직도 받지 않고 청의 연호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의 심양으로 압송됩니다. 그 때 최명길도 명나라에 밀서를 보냈다는 이유로 잡혀와 있었는데, 조선을 대표하는 두 대신은포로의 신세로 함께 잡혀 있으면서 끝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묵은 오해를 풀게 되는데, 먼저, 김상헌이 시 한절을 읊조리죠 從尋兩世好(종심양세호) - 조용히 두 사람의 생각을 찾아보니頓釋百年疑(돈석백년의) - 문득 백년의 의심이 풀리는구료 이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