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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백선엽 장군 (기사, 추모글 2)자유게시판 2020. 7. 11. 17:16
(서울=연합뉴스) 정빛나 최평천 기자 = 100세를 일기로 별세한 '6·25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의 장례가 5일간 육군장으로 거행된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2묘역으로 확정됐다.
육군은 11일 부고를 내고 오는 15일 오전 7시 30분 서울아산병원에서 서욱 육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육군장 영결식을 연다고 밝혔다. 같은 날 11시 30분 대전현충원에서 안장식을 거행한다.
서 총장이 장의위원장, 김승겸 육군참모차장이 부위원장을 맡았다. 장의위원은 육군 일반참모부장들로 구성됐다.
전날 오후 11시 4분께 별세한 백 장군은 불과 33세 나이에 1953년 1월 육군 대장으로 진급, 대한민국 군 역사상 최초로 4성 장군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육군은 이날 부고와 함께 낸 보도자료에서 "고(故) 백 장군은 1950년 4월 제1사단장으로 취임해 낙동강지구 전선의 다부동 전투에서 한국군 최초로 합동작전을 통해 대승을 거둬 반격작전의 발판을 제공했다"며 "같은 해 10월 국군 제1사단이 먼저 평양을 탈환해 민족의 자존심과 국민의 사기를 드높였다"고 밝혔다.
그는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임관했으며, 제1사단장, 제1군단장, 제1야전군사령부 초대 사령관, 제 7·10대 육군참모총장, 제 4대 연합참모본부 의장 등을 역임했다.
태극무공훈장과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은성무공훈장, 캐나다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육군은 또 백 장군이 1951년 7월 미국이 북한, 중국과 휴전협상을 시작했을 때 한국군 대표로 참석했고, 1952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어 미군의 벤플리트 장군과 함께 10개 예비사단 창설, 군 훈련체계 개혁 등 군 근대화에 앞장섰다고 평가했다.
한편, 육군장 규정에 따르면 장례는 3일장과 5일장 등으로 치를 수 있는데 백 장군의 경우 유족 측 협의 등을 거쳐 5일장으로 결정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백 장군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명단에 이름이 오르는 등 생전 친일 행적이 논란이 됐던 만큼 군의 장례와 장지 결정을 두고 일각에서는 비판이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빈소는 현재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으며, 유족으로는 부인 노인숙씨, 아들 백남혁·남홍씨, 딸 남희·남순씨가 있다.
shin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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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같이한 만남 하나하나…한·미 동맹의 역사적 장면들
샤프 전 주한미군사령관 추모글
“그를 위해선 늘 시간 비워둬야”
틸럴리 전 연합사령관이 조언
샤프 전 주한미군사령관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별세 소식을 듣고 한국과 미국 모두에서 애도가 이어졌다. 2008년 6월부터 2011년 7월까지 3년1개월간 주한미군사령관을 지낸 월터 샤프 예비역 육군 대장은 중앙일보에 고인을 추모하는 기고문을 e메일로 보내왔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방보좌관을 역임했던 육군 중장 출신의 김희상 한국안보문제연구소 이사장도 추모의 글을 보내왔다. 샤프 전 사령관은 고인을 “역사 속 거인”으로, 김 이사장은 고인을 “호국의 영웅”으로 기렸다.
세상에서 진정한 모범과 영웅을 찾기가 힘들다. 그러나 백선엽 장군은 한·미 동맹은 물론 그의 진심, 리더십, 헌신 그리고 한·미 동맹에 대한 사심 없는 봉사를 존경하는 수백만의 군인과 민간인에게 더 큰 역할을 했다.
나도 백 장군처럼 놀라운 기억력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처럼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에 대해 사소한 것들을 다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위대한 사람에 대한 기억은 내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1996년 존 틸럴리 주한미군 사령관 겸 연합사령관의 부관으로 처음 한국에 부임했다. 그때 “한국엔 단 한 사람이 있는데, 그를 위해선 언제라도 시간을 비워둬야 한다”고 들었다. 그가 바로 백 장군이었다.
우리가 백 장군과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것은 단지 중요한 만남이 아니었고,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와 같이했던 모든 지형 도보 답사, 사무실 방문, 동맹 회의는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이었다. 나는 말 그대로 그의 리더십과 헌신, 그리고 그가 한·미 동맹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를 보고 경외심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사령관으로 다시 한국을 찾은 2008년부터 2011년까지의 일이었다. 나는 살아 있는 전설인 백 장군을 집으로 초청한 후 긴장했다. 나는 내 전임 사령관이 했던 것처럼 이 멋진 분을 모시는 데 만전을 기하고 싶었다. 처음 그와 저녁을 함께 하는 날, 백 장군은 나를 따뜻하게 맞아줬고 내 걱정은 씻은 듯 사라졌다.
나는 천성적으로 내성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백 장군은 이전 사령관들에 대한 얘기와 힐탑하우스(사령관 관사)에서의 시간을 전해주면서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의 배려에 감사했다.
지금 그때의 기억을 되돌아보면 역대 사령관들도 한국과 미국 역사 속 거인인 백 장군과 역사적 순간을 공유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는 이 위대한 리더이자 멘토, 그리고 무엇보다도 친구라 불렀지만 훌륭한 모범을 보여줬던 그를 그리워할 것이다.
백 장군님, 고맙습니다. 당신은 과거와 현재 세대들에게 모범을 보여 한·미 동맹이 중요하고 강력해지도록 만드는 데 도움을 주셨습니다. 당신은 미래 세대에게 한·미 동맹이 계속 발전하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월터 샤프 미군 예비역 육군 대장·전 주한미군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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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용사 늘 챙긴 호국 상징…백 장군 이젠 부하들 곁으로
김희상 예비역 중장 추모글
풍전등화 신생 대한민국 굳게 다져
공직 떠나서도 군과 안보 위해 최선
김희상 예비역 중장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별세 소식을 듣고 한국과 미국 모두에서 애도가 이어졌다. 2008년 6월부터 2011년 7월까지 3년1개월간 주한미군사령관을 지낸 월터 샤프 예비역 육군 대장은 중앙일보에 고인을 추모하는 기고문을 e메일로 보내왔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방보좌관을 역임했던 육군 중장 출신의 김희상 한국안보문제연구소 이사장도 추모의 글을 보내왔다. 샤프 전 사령관은 고인을 “역사 속 거인”으로, 김 이사장은 고인을 “호국의 영웅”으로 기렸다.
언론마다 ‘전쟁 영웅’이라는 찬사로 우리 백선엽 장군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3년여 한국전쟁(6·25 전쟁) 중 대한민국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 낸 결정적 전투의 하나가 1950년 8월 다부동 방어 전투이고, 우리가 통일을 내다보며 쾌속 북진했던 가장 장쾌한 공격 작전은 1950년 10월 1사단의 평양 선두 입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두 결전의 승리를 백 장군님이 이끄셨으니 그것만으로도 당연히 그런 찬사는 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백 장군님의 대한민국에 대한 그 많은 공헌과 큰 인물됨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전쟁 영웅’이라는 한마디로는 미흡합니다. 예컨대 전쟁 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동맹으로 끌어들이고, 국군을 확충해 풍전등화의 신생 대한민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데도 육군참모총장 백 장군님의 뒷받침이 절대 적지 않았습니다. 백 장군님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직접 설득해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끌어낸 것이나, 반공포로 석방과 같은 한·미 간 큰 갈등을 해결해 동맹으로 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국군 강화엔 더욱더 그랬습니다. 1954년 2월 우리 군이 동양 최초의 야전군인 제1야전군을 창설하자 참모총장이던 백 장군님이 그 초대 사령관으로 내려가 틀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결국 우리가 6·25 위기를 극복하고, 지난 1000여 년 이어지던 중국의 핍박에서 벗어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으로 번영하는 데 백 장군님의 헌신도 컸습니다. 더욱이 백 장군님은 모든 공직에서 떠난 뒤에도 항상 군과 안보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호국 국군’의 상징이 됐습니다.
100세를 눈앞에 둔 작년 11월 14일 4명의 역대 연합사령관들이 찾아뵙고 눈물을 글썽이며 “백 장군님은 우리 모두의 영웅”이라며 “동맹 포에버!”를 외친 감동적 장면은 상징적이었습니다.
작년 11월 22일 그 불편한 몸으로도 현충원 무명용사 묘역을 찾았던 백 장군님이 아니십니까? 그래서 다부동에서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고 했습니다. 앞장을 섰을 때는 다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평양 진격 때는 지원 미군들까지 한목소리로 ‘평양, 평양’을 외쳤습니다.
돌이켜 보면 어느 것 하나 소중하고 존경스럽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백 장군님은 앞으로도 호국의 위인이자 영웅으로 남으실 것입니다. 존경하는 백 장군님의 영전에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깊은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김희상 예비역 육군 중장·한국안보문제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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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설명 중 2008년11월은 2018년11월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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