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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삼중 스님 회고기] - 운보 김기창 화백의 언어장애인 재소자 사랑 / 글 장만호
    자유게시판 2020. 7. 30. 13:30

    청송교도소를 방문한 운보 김기창 화백언어장애인 만나 교화활동

     

    1980년대 중반 쯤 삼중 스님이 서울 영등포 교도소 재소자 교화에 몰두할 때다. 분위기도 삼엄하고 벽이 음침해서 좋은 그림으로 벽을 장식하면 좋겠다. 생각으로 교도소 측 동의를 구해 운동장 벽에 화가들에게 부탁해 벽화를 그린다. 완성 되니 참 좋았다. 재소자 뿐 아니라 교도관들도 그림을 보며 마음이 편할 수 있었다.

     

    그 쯤 청송교도소를 짓는다 소문이 돌았다. 흉악범들은 거의 그 쪽으로 수감을 할 때다. 깊은 산 속에 최악의 교도소였다.

     

    법무부 쪽에서 영등포 교도소처럼 삼중 스님께서 해 줄 수 있는지 동의를 구했다. 청송교도소 넓은 벽에 그림을 걸어주는 일을 시작 한다. 그때 고 운보 김기창 화백(1913218-2001123)이 생각났다. 일면식도 없는 나로서는 난감했다. 당대 최고의 화가인 운보 화백을 만날 방법이 없다.

     

    그런 어느 날 시인 구상 선생과 운보 화백이 친하게 지낸다는 걸 알고 구상 선생에게 운보 화백 그림 한 점을 청송교도소에 걸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느냐 청을 한다.

     

     

    삼중 스님과 운보 김기창 화백(오른쪽). ©브레이크뉴스

     

     

    삼중 스님과 운보 김기창 화백(오른쪽). ©브레이크뉴스

     

     

     

    삼중 스님과 함께 청송교도소를 방문했던 인사들. 맨 오른쪽은 고 구상 시인. ©브레이크뉴스

     

     

    ▲ 삼중스님과 운보 김기창 화백(가운데). ©브레이크뉴스

     

     

    구상 선생 말씀이 그건 안 되는 일이라고,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그림만은 그냥 주는 법이 없으니 괜히 삼중 스님 헛고생 할 필요 없으니 포기하란다.

     

    헌데 포기가 되지 않았다. 결례를 무릅쓰고 운보 화백에게 전화를 건다. 아들 김완씨가 전화를 받는다. 의외로 긍정적인 말을 듣는다. 부친께 잘 말씀드리고 결과는 전화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들에게 답신이 왔는데, 의외였다. 아버님께서 청록산수 전지 1점을 청송교도소 직접 가서 걸어주시겠답니다. 당시 청록산수 전지 1점이면 5000만원에 거래가 될 때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도 그 바쁜 분이 직접 청송교도소를 같이 간다 하니 참으로 감사한 일, 삼중 스님과 운보 김기창 화백의 인연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그림 헌정식을 하는 날 삼중 스님, 운보화백, 통역으로 운보의 조카, 몇 분의 화가와 지인들이 청송교도소에 동행을 한다. 운보화백이 직접 온다는 말에 많은 분들이 와 있었다.

     

    법무부 심의관, 본부에서 온 인사, 여러 교도소장들이 운보 화백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당에 현수막이 걸리고 재소자 2000명 정도가 운집해 운보 화백을 환영했다. 축사가 끝나고 삼중 스님이 인사말을 하고 내려오는데 운보 화백이 당신도 인사말을 하고 싶다 청한다. 통역에게 물으니 부인이 조금씩 말을 가르쳐 인사말 정도는 가능하단다.

     

     

    김기창 화백이 재소자를 격려하는 모습. ©브레이크뉴스

     

     

    10분간의 명연설이었다.

     

    "여러분들 보니 참 잘 생겼다. 젊고 미남이고 인물들이 다들 훤하다. 그런데 인물들은 잘 생기고 건강 한데, 죄를 여러 번 지어 청송까지 왔으니 너희들은 장애인들 아니냐?"

     

    "너희들은 몸은 건강하지만 마음이 장애인들이다. 나는 너희들이 흔히 말하는 언어장애인(벙어리)이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듣지는 전혀 못 해, 헌데 오늘 여기 와서 너희들에게 좋은 그림을 걸어 주려고 왔다."

     

    무서운 범 같은 혈기 왕성한 그들 앞에서 위험천만한 말이었다. 얼마 전 모 대학교수가 강연 중에 "전과자"라는 말을 했다가 큰 사고를 당할 뻔 했단다.

     

    교도관들이 운보의 연설을 들으며 안절부절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운보 화백은 역시 달랐다.

     

    "너희들은 다 몸은 건강한데 정신은 장애인들이 맞다. 나는 너희들 말 대로 몸은 장애인이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듣지도 못 하고 한평생 이렇게 살지만 정신이 건강하다. 그래서 오늘날 세계 화단에 이름을 내고 있지 않느냐 헌데 너희들은 몸은 건강한데 정신은 장애인들이야"

     

    범 같은 재소자들이 꼼짝을 못한다. 10분간의 명연설이었다. 역시 한 세계의 거장이 되면 모든 세계에 통하기 마련이다. 응집력이 대단한 연설이었다. 3시쯤 행사를 끝내고 돌아가야 하는데 운보 화백이 이렇게는 갈 수 없다. 떼를 쓴다.

     

    "내가 여기 와서 높은 사람들이나 만나러 온 게 아니다. 바쁜 내가 여기까지 와 그림을 걸어 주는 이유는 이 청송교도소에는 나 같은 언어장애인 죄수가 많다. 그들을 위로해 주려 했는데 아직 언어장애인 재소자를 한 사람도 못 만났다. 언어장애인 재소자를 한 번 끌어안아 주고 가고 싶다.“

     

    그러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 고집이 대단 했다. 그때 청송교도소는 특별한 보안지역이고 중범자들이 수용되는 곳이었다. 교도소장과 본부에서 내려온 인사의 배려로 재소자 감방 제일 가까운 지점 사무실에서 언어장애인 재소자를 만난다. 언어장애인 재소자를 보자마자 격하게 끌어안았는데. 그 모습이 지금도 선연하다. 극적인 장면이었다.

     

    "언어장애인이 된 것만도 가슴 아픈 일인데 너희는 죄를 여러 번 지어 이 험한 청송까지 오지 않았느냐?"

     

    눈물을 흘린다. 운보 화백은 최초로 "언어장애인 축구단"을 만들고 언어장애인 복지 시설을 운영했었다.

     

    "다시는 이런데 들어오지 말아야 한다. 이런데 언어장애인이 들어오면 건강한 사람들이 놀리고 욕한다. 어려워서 죄를 지었겠지만 앞으로는 들어오지 마라. 출소해서 정 힘들면 나를 찾아와라. 내가 너희들이 쉴 수 있는 쉼터를 운영하고 있다. 축구를 잘 하면 축구 선수도 될 수 있다."

     

    참으로 인간적인 통곡이었다. 교화 위원들도 재소자들이 출소하면 만나길 거리끼는 법인데, 흔쾌히 자기를 찾아오라 한다. 재소자들이 출소 하면 감옥에서 잃어버린 욕구를 한꺼번에 분출하기 때문에 그 욕구를 다 채워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운보 화백은 스스로 찾아 오라 한다.

     

    내가 여기까지 온 목적은 나처럼 불쌍한 언어장애인 재소자를 만나러 왔지, 그림이나 걸어 주고 행세하러 온 게 아니다.

     

    "꼭 만나게 해 달라" 떼를 쓰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그립다. 삼중 스님은 말한다. 그때부터 운보 화백은 나와 교도소 동행을 자주 하게 된다. 다음 방문한 곳은 제주 교도소였다. 제주도에도 교도소가 있습니까? 하시고는 흔쾌히 동행을 수락했다. "청록산수" 한 점을 직접 걸어주고 언어장애인 재소자를 끌어안아 주셨다. 그리고 삼중 스님이 재소자 가족 돕기 자선 전람회를 하는 제주 칼 호텔에 오셔서 개막식 테이프 커팅도 해 주었다.

     

    덕분에 삼중 스님은 자선 전람회를 성황리에 끝낼 수 있었다 한다. 그 뒤에도 영등포 교도소에 그림 한 점 의정부 교도소에 그림 한 점 안양 교도소는 방문 하셨지만 그림 대신 다른 선물을 주셨다. 삼중 스님은 말한다.

     

    운보 화백의 성품을 느낄 수 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한번은 법무부 간부 한분이 삼중 스님께 부탁을 해 왔다. 운보 화백의 청록산수 전지 1점을 법무 연수원에 걸고 싶은데 삼중스 님과 운보 화백은 교도소에 재소자 정서 순화를 위해 그림을 기증해 주셨으니 법무 연수원에도 1점 부탁합니다. 그런 뜻. 삼중 스님이 운보 화백을 만나 법무부 간부가 법무 연수원에 청록산수 1점을 걸어주었으면 하는데요. 이야길 꺼내니 일언지하에 거절을 한다.

     

    법무부는 예산이 있어요. 그림 값 5,000만원 가지고 와서 이야기하세요. 한다. 결국 법무부 간부는 포기 하고 만다. 그럼 운보 화백은 교도소 건물에 왜 작품을 기증했을까? 교도소에 자기와 같은 언어장애인들을 위해 흔쾌히 작품을 내 주신 것이었다. 돌아가신지 오래 지만 지금도 운보 김기창 화백의 호탕한 모습이 그립다고 삼중 스님은 말한다. 아래는 필자가 쓴 운보 김기창 화백을 위한 추모시이다.

     

     

    장만호 시인. ©브레이크뉴스

     

    [김기창 화백 추모시] 거인의 향기 - 장만호 

     

    흰 고무신에 빨간 양말

    어린아이들을 보면

    항상 웃고 있었다

    하늘과 땅을 넘나들며

    인간과 자연을 마음먹은 대로

    주물러 생명을 엮어 내는 도인.

     

    시 공간을 초월해

    사물과 호흡 나누며

    돌 속에 인간을 가꾸고

    수목에 생명을 불어 넣는 예인

     

    삼중 스님과 청송교도소에

    청록산수 한 점에 당신의 온기를 불어 벽에 걸었다

    많은 재소자들 뜨거운 심장에

    정서의 모를 심어 주신 분

    시간이 가면 황금빛 벼로

    자랄 것이다.

     

    젊은 재소자들에게

    "너희들은 몸은 건강하고 

    잘 생겼지만 정신은 장애인들이다.

    나는 육체는 장애인이지만

    마음이 건강해 너희들에게

    좋은 그림을 걸어주기 위해

    이곳에 왔다."

    호통 치시던 그 모습은

    범접할 수 없는 거인.

     

    "언어장애인 재소자를 만나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내가 여기 온 목적은 나와 같은

    언어장애인 재소자를 만나 끌어

    안아 주고 싶어 온 것이다."

    때를 쓰셨던 참으로 진솔한 분

     

    아! 거인의 향기

    세상이 내 맘 같지 않은 시절

    그 향기 멀리멀리 퍼져

    누리에 짙게 배어든다

     

    운보 김기창 화백

    그는 세상에 "청록산수"만 두고 가신게 아니었다

    텅 빈 가슴 가슴에 사랑을 나누고

    머나먼 길을 떠나신 거인.

     

     

    <2020. 7. 29>  haeun5709@hanmail.net

    *필자 : 장만호

    아동문학가, 시인. 디카시인, 시낭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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