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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짧은 피아니스트자유게시판 2020. 8. 27. 10:50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 (Ignacy Jan Paderewski) / 폴란드 총리
피아니스트가 꿈인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음악학교에서 선생님들은 "얘야. 넌 손가락이 너무 짧고 굵구나. 피아니스트로선 성공하기 어려운 손이다.
차라리 다른 악기로 전공을 바꾸어라!"라고 소년의 짧고 굵은 손가락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소년의 부푼 꿈은 날마다 절망과 좌절로 바뀌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한 파티 모임에서 분위기를 돕는 반주자로 피아노를 연주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파티가 끝나갈 무렵 한 신사가 소년에게 다가옵니다.
"얘야. 너는 피아노에 소질이 있구나.
열심히 노력하렴."
소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쇼팽 이후 가장 뛰어난 폴랜드 피아니스트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었습니다.
이후 소년은 하루에 일곱 시간씩 피아노에 매달려 연습을 합니다.
1875년부터는 폴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 유학을 거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성장합니다.
1909년에는 다시 폴란드로 컴백해 모교인 바르샤바 음악원의 원장을 역임합니다.
그의 이름은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 (Ignacy Jan Paderewski)입니다
그가 가난하고 어렵게 공부하던 1892년,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에 다니던 학생 두 사람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자금 마련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파데레프스키를 초청해 자선 연주회를 계획합니다.
2천 달러의 개런티를 약속하고 공연을 하기로 했으나 공연 수익금이 1600달러 밖에 모이질 않았습니다.
이러한 딱한 사정을 알게 된 파데레프스키는 자신에게 주어져야하는 1600달러 마저도 가난한 학생들의 학자금으로 내놓습니다.
27년의 세월이 흐릅니다.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합니다.
당시 폴란드는 독일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3개 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폴란드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1918년 완전한 독립을 이루어 폴란드 공화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바로 그 때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진 얀 파데레프스키.
빨간 머리 소년, 손가락이 짧고 굵어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조롱 받은 바로 그 소년이 폴란드 초대 수상이 됩니다.
그러나 1차 대전의 후유증으로 폴란드는 극심한 식량난으로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고 가뭄까지 겹치면서 식량난은 더 극심해 집니다.
파데레프스키는 국민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지 못하는 무능한 총리로 정치적으로 사퇴해야할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폴란드에 갑자기 2백만 톤 이나 되는 엄청난 식량이 미 연방 식량
구호국에서 도착한 겁니다.
"30여년전 우리는 정말로 당신께 감사했습니다. 늦게마나 우리가 당신을 도울 수 있어 감사할 뿐 입니다.”라는 편지와 함께.
파데레프스키는 30여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회상에 잠깁니다.
1892년에 1600달러의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을 받으며 훗날 꼭 그 은혜를 보답하겠다 약속 했던 스탠포드의 두 청년이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스탠포드 대학생 중 한 사람은 훗날 미국의 31대 대통령이 된 허버드 클라크 후버,
그가 당시 미국의 연방식량 구호국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손가락이 굵고 짧다는 부정적인 사실을 지적받으며 실망과 좌절을 하기보다는
"너는 피아노에 소질이 있구나!"하는 칭찬과 격려에 더 귀를 기울이고 믿었던 소년이 실제로 피아니스트가 되고, 꿈을 이루는데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돕고, 한 나라의 총리가 되고,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구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인생에서 어떤 말을 선택해 듣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폴란드어: Ignacy Jan Paderewski, 1860년 11월 18일 ~ 1941년 6월 29일)는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작곡가, 총리였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에 폴란드 공화국의 탄생과 동시에 초대 수상이 되었다.
폴란드의 쿠리를후카에서 태어났다. 1872년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졸업 후 5년간은 모교의 피아노과 교수였고, 다시 1881년 이후는 베를린에서 수년간 작곡법등을 배웠으나, 피아니스트가 될 것을 결심하고 곧바로 빈으로 가서 레셰티츠키에게 배웠다. 1887년, 빈에서 독주회를 열게 되자 명성은 점차 높아가고, 1909년에는 바르샤바 음악원 원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으로 갔으며,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폴란드의 자유를 권유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폴란드가 독립을 맞자, 귀국하여 폴란드 공화국 최초의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수상직은 단 1년으로 사임하고, 다시 피아니스트로서 화려한 활동을 하였다. 만년에는 스위스에서도 살았으나, 다시 미국으로 가 뉴욕에서 객사하였다. 그는 알링턴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으나, 1991년 폴란드로 유해가 옮겨져 바르샤바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옥스퍼드 대학교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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