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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 신도비(神道碑) / 묘소(墓所) 외나의 이야기 2022. 1. 9. 20:23
본관 광주(廣州). 자 명보(明甫). 호 한음(漢陰) ·쌍송(雙松) ·포옹산인(抱雍散人). 시호 문익(文翼). 1561년 출생하였고 부친은 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이민성(李民聖)이다. 당시 대사간이자 동인에 속한 이산해(李山海)의 딸과 혼인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으며 이때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이산해의 작은아버지)이 이덕형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사윗감으로 추천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덕형의 부인 한산이씨는 임진왜란 때 왜적을 피해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고 대제학 이이(李珥)에게 발탁되어 정자(正字)를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이듬해 박사(博士)가 되고 수찬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91년 예조참판에 오르고 겨우 31세에 대제학을 겸임했다. 당시 이덕형의 학문과 인품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며 조선역사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대제학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서 대동강까지 파죽지세로 공격해온 왜군의 사신 겐소[玄蘇]와 홀로 배를 타고나가 화의를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왕을 정주(定州)까지 호종하였고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로 가서 원병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귀국 후 한성부판윤이 되고,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으로 활약했다. 1593년 선조는 이덕형의 공을 인정하여 병조판서에 임명하였고 이듬해에는 이조판서가 되고 조선의 군사편제를 새롭게 만든 훈련도감(訓鍊都監) 당상에 임명하였다.
1598년 우의정에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1601년 경상 ·전라 ·충청 ·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가 되어 전쟁 후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잠시 한직에 있다가 1608년 광해군의 즉위와 동시에 영의정에 복직하였다. 명나라에서 광해군(光海君)을 적통을 이어받은 왕으로 인정하지 않자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북인(대북파)와 대립하였고 결국 모든 관직이 삭직되고 낙향하여 경기도 양근(楊根)으로 물러났다가 경기도 광주 사저에 머물다 병을 얻어 1613년 사망했다.
이덕형은 남북인(南北人)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했으나 당색이 강하지 않았다. 장인 이산해는 대북 강경파로 당색이 달랐으며 장인이 영수로 있는 대북파에 의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나 광해군의 총애로 위기를 넘겼다. 절친한 사이로 잘 알려진 이항복(李恒福)과는 기발한 장난과 우정이 얽힌 많은 일화를 남겼고 1613년 사망했을 때 이항복이 가장 슬퍼하며 이덕형을 직접 염을 했다고 전해진다. 인조 때 복관되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있다.
1985년 9월 20일 경기도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었다. 광주이씨 좌의정공파 종중이 소유하고 있으며 청계산(淸溪山) 서쪽 형제봉(兄弟峯) 줄기에 있다.
묘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묘비 1기(基), 상석(床石)이 있으며 그 앞에 가로로 긴댓돌로 단을 쌓았다. 단 아래 좌우에는 동자석(童子石)이 있고 그 앞에 망주석(望柱石)·문인석(文人石)이 좌우로 있다. 대리석으로 된 묘비의 크기는 높이 155㎝, 너비 60㎝, 두께 20㎝이다.
신도비는 1653년(효종 4)에 세웠으며 묘역 아래 약 300m 지점에 있다. 화강암으로 된 직사각형 비좌(碑座)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螭首)를 올렸다. 크기는 높이 360㎝, 너비 110㎝, 두께 42㎝이고 근래에 비각을 건립하였다. 비문은 조경(趙絅)이 찬(撰)하였으며, 정규상(鄭奎祥)이 전액(篆額)을 썼다. 신도비에서 동쪽으로 약 150m 떨어진 곳에 이덕형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영정각이 있다.
오성 이항복(李恒福)과 한음 이덕형(李德馨)에 관한 일화
오성과 한음은 조선 선조 때 명신으로, 어려서부터 친구로 지내면서 장난이 심하고 기지가 뛰어나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몇 개의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오성의 담력 : 한음으로부터 한밤중에 전염병으로 일가족이 몰살한 집에 시체 감장을 부탁받은 오성이 혼자 그 집에 이르러 시체를 감장하다가 갑자기 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며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였는데, 알고 보니 시체인 체 누워 있었던 한음의 장난이었다는 것이다.
오성의 아버지는 오성의 담력을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외딴 숲 속의 고목나무 구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 오라고 시키고, 먼저 가서 나무 구멍 속에 숨어 있다가 오성이 구멍 속으로 손을 넣을 때 안에서 그의 손을 잡았는데, 오성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체온이 느껴지자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장난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② 오성에게 똥을 먹인 한음 부인 : 오성이 한음 부인과 정을 통하였다고 한음에게 말하자, 이 말을 들은 한음 부인은 오성을 초청해서 떡에 똥을 넣어 오성에게 먹이고 거짓말을 하는 입에는 똥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③ 오성의 선보기 : 오성은 신붓감을 선보려고 인절미를 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몽둥이로 자기를 쫓으며 때리라고 시킨 뒤 도망치는 체하며 신부의 치마폭 속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선을 보려면 겉선이나 보시지 속선까지 보십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④ 한음의 참을성 : 오성은 우연히 도깨비를 만나 장차 정승까지 하리란 예언을 듣는다. 그리고 한음에게 변소에서 자기는 불알을 당기는 도깨비를 만나 예언을 들었다고 하며 변소에 가서 앉아 있어 보라고 한 뒤 노끈으로 한음의 불알을 매어 당겼다. 한음이 아픔을 참고 견디자 정승까지 하겠다고 말한 뒤 한음에게 변소에서 일어난 일을 본 것같이 말하였다. 이에 한음은 비로소 오성에게 속은 줄 알았다는 것이다.
⑤ 오성과 대장장이 : 오성은 어려서 대장간에 놀러 다니면서 대장장이가 만들어 놓은 정(釘)을 하나씩 궁둥이에 끼어다가 모아 놓았다. 정이 하나씩 없어지자 대장장이는 오성의 장난인 줄 알고 불에 달군 정을 맨 위에 놓아 오성의 볼기짝을 데이게 하였다. 뒷날 대장장이가 곤궁하게 되자 오성은 모아 놓았던 정을 도로 주어 곤궁을 면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⑥ 권율과 오성 : 오성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집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율 집에서 차지하자, 오성은 권율이 있는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이 주먹이 누구 주먹이오?” 하고 물었다. 권율이 “네 주먹이지 누구 주먹이겠느냐.”라고 말하자 감을 가로챈 일을 추궁하였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오성과 부인이 서로 골탕 먹이는 이야기 등이 많이 있다. 「오성과 한음설화」는 어린이들의 기지와 해학을 통하여 인간의 약점과 인간의 본성을 신선하게 조명한 우리의 귀중한 해학 문학으로서 가치를 가진다.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8)
오성과 한음설화 [鰲城─漢陰說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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