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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시 唐城-弘法寺-홍법리 南陽洪氏묘역 탐방
    나의 이야기 2023. 3. 19. 08:33

        화성시 당성(唐城)은 삼국시대에 처음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영역기에는 '당항성(黨項城)'으로

    지칭되었다. '당성(唐城)'이라는 명칭은 5세기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화성 일대가

    고구려에 속하면서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리고 이후 신라의 영역으로 포함되면서

    당은군(唐恩郡), 당성진(唐城鎭)의 행정구역이 되었다. 삼국통일 전쟁기와 통일신라시대에

    당성은 바다를 건너 중국과 실크로드로 통하는 길목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8년 발굴 조사로 화성 당성이 1차성과 2차성의 복합산성임이 확인되었다.

    삼국시대의 1차성은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쌓은 테뫼식 산성이고,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2차성은 계곡부를 포함하여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지금까지 8차에 걸친 발굴을 통해 당성에서는 명문기와, 토제마, 중국 백자 등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당성의 발굴 조사는 지금도 진행중이다.

     

    화성시 서신면 [화성당성방문자지원센터)
    홍법사 대웅전

    용담 효자각 ▲ ▼

     

    화성시홍법리 남양홍씨 묘역도

     


                      <화성·弘法寺> 홍랑(洪娘) 각시의 영험

     

    홍법사 홍랑보살 상 (弘法寺 洪娘菩薩 像)

     

    『아니 중국 천자는 자기 나라에 여자가 없어서 조선으로 여자를 구하러 보냈나.』
    『다 속국인 탓이지요.』
    『아무리 속국이기로서니 조정에서 이렇게 쩔쩔매니 장차 나라 꼴이 큰일이구려.』
    『자, 이렇게 모여 있을 것이 아니라 어서 여자들을 피신 시킵시다.』
    『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누구네 집에 어떤 딸이 있는지 다 알고 있을 텐데.』
     
    신통한 묘책이 없어 수심에 잠겨 있는 마을 사람들 앞에 드디어 관원들이 나타났다. 육모방망이를 든 포졸들을 앞세우고 외쳤다.
    『얘들아, 마을을 샅샅이 뒤져 젊은 여자를 모조리 잡아 끌어내라.』
     
    포졸들에게 끌려 나오는 여인들의 치마는 땅에 끌렸으며, 강제로 허리를 껴안고 나오는 포졸들의 입은 헤벌려 있었다.
    마을에서 자색이 뛰어난 홍만석의 딸 홍랑 역시 발버둥을 치며 끌려 나왔다.
     
    『오늘 우리는 중국 천자에게 진상할 처녀를 물색하러 조정의 명을 받고 나왔느니라. 우리 고을에선 홍만석의 딸 홍랑을 진상키로 하였다.
    만약 이를 거절한다면 왕명을 어긴 죄로 3대를 멸할 것이며 우리 홍법리 마을은 마땅히 폐촌을 면치 못하리라.』
     
    관원은 득의양양하게 일장 연설한 다음 홍랑에게 말했다.
    『홍랑아, 어서 분단장 곱게 하고 관아로 가자.』
     
    관아의 동헌 마루에 높이 앉은 명나라 사신은 곱게 차린 홍랑을 보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헤헤… 조선에 미녀가 많다더니 이거 참으로 선녀로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홍랑은 넋을 잃고 주저앉은 아버지 홍만석의 모습과 자기만을 주시하는 마을 사람들을 보고 결심을 했다.
     
    『가겠습니다. 나으리. 그러나 명나라에 가게 되면 모래 서말과 물 서말, 그리고 대추 서말을 가져가게 하여 주십시오.』
    『그야 천자의 애첩이 될 몸인데 무슨 소원인들 못 들어주겠느냐. 어서 가자.』
     
    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인 광해군 2년(1610), 홍랑은 명나라로 떠났다.
    『허- 참으로 아름답구나. 네 이름이 무엇인고?』
    『홍랑이라 하옵니다.』
    『홍랑이라. 이름도 곱구나. 참으로 조선에 천상의 미녀 못지않은 미인이 있었구나. 여봐라, 홍랑을 별궁에 거처토록 하고 매사에 불편이 없도록 하라.』
     
    천자는 명을 내렸다. 천자의 후궁이 되면서부터 홍랑은 말을 잃었다.
    가져온 모래를 뜰에 뿌리고 목이 마르면 가져온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대추로 연명했다.
     
    홍랑의 아름다운 자태는 날로 수척해 갔다. 고향과 부모를 그리며 염불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아씨, 오늘은 제발 저녁을 드십시오.』
    『아니 먹을 것이니라. 나는 명나라 후궁이 되었으나 오늘까지 명나라 음식은 커녕 물 한 모금 먹지 않았으며 명나라 흙도 밟지 않았느니라.』
    『내일이면 물도 대추도 떨어집니다. 이제 무얼 잡수시겠습니까?』
    『내일이면 내 생명은 다할 것이나, 죽어 보살이 되어 천자를 회개시킬 것이다.』
     
    다음날 홍랑은 세상을 하직했다.
    홍랑이 죽은 지 사흘째 되던 날. 천자는 우연히 병을 얻었으며 병세는 날로 악화 돼 혼수상태에 빠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천자는 비몽사몽간에 홀연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오, 너는 홍랑이 아니냐?』
    『그러하옵니다. 소첩이 폐하를 구하러 왔사오니 제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홍랑의 말소리는 허공에 울리고 천자는 두려움에 떨었다.
    『폐하, 앞으로는 백성을 아끼고 불도를 닦는 착한 임금이 되십시오. 그리고 소첩을 고향으로 보내 주옵소서.』
     
    『내 착한 임금이 되도록 힘껏 노력은 하겠으나 너를 어떻게 고향으로 보낼 수 있겠느냐. 제발 짐을 살려다오.』
    『폐하, 소첩의 혼이 담긴 보살상을 조성하여 무쇠 사공과 함께 돌배에 태워 보내십시오.』
    『아니 그럼 홍랑은 보살님이시었던가.』
     
    천자는 석달 열흘에 걸쳐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며 천하 유명한 석공과 철공을 모아 돌배와 무쇠 사공을 조성했다. 그러나 괴이하게도 홍랑의 보살상은 완성될 무렵이면 두 쪽이 나곤 했다. 세번, 네번 다시 만들어도 마찬가지였다.
     
    천자는 쉬지 않고 일심으로 기도했다. 어느 날 새벽 인시 북소리의 여음에 이어 인자한 음성이 들렸다.
    『착하도다. 대왕은 홍랑의 마지막 모습을 보살상으로 새겨야 하느니라.』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보니 천자는 불상 앞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정신을 차려 홍랑의 모습을 그려 봤으나 영 떠오르지를 않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홀연 한 줄기 바람이 일며 홍랑이 나타났다. 수척하면서도 인자한 모습 그대로.
     
    이를 본 천자는 죄업을 뉘우치며 전신을 찌르는 아픔을 느꼈다.
    『홍랑 보살님, 짐의 죄를 용서하십시오.』
     
    다시 석공을 불러 보살상을 조성한 지 백일째 되던 날 홍랑 보살상이 완성됐다. 천자는 크게 잔치를 베푼 후 홍랑 보살상을 12명 쇠 사공과 함께 돌배에 태워서 물에 띄웠다.
    돌배는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홍법리 홍랑의 고향 앞바다에 닿았다. 때는 광해군 3년(1611)의 이른 봄. 마을 홍씨 문중에선 홍랑 보살의 영험을 기리기 위해 절을 세우고 홍랑(洪娘) 보살상을 모신 후, 절 이름을 홍법사(弘法寺)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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